감독
봉준호

주연
배두나....박현남
이성재....고윤주
김호정....배은실
고수희....윤장미(뚱녀)
변희봉....변경비
김뢰하....부랑자 최모씨
김진구....치와와 할머니
임상수....준표 선배
권혁풍....관리소 주임
조한희....현남 엄마

1.

백수나 다름없는 시간 강사인 윤주는 아파트 어딘가에서 들리는 개소리 때문에 미칠 지경입니다. 마침내 '용의자' 개를 찾아낸 윤주는 개를 납치해 보일러 실에 감금하지만 개소리는 사라지지 않는군요.

한 편, 새마을 금고 강도 사건으로 유명해진 최금희 언니를 마음 속 영웅으로 숭상하고 있는 아파트 관리소 경리 현남은 아파트에서 계속 발생하는 강아지 실종사건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다 두번째로 사라진 강아지가 살해되는 현장을 목격한 현남은 빨간 옷을 입은 용의자를 추적하게 되는데...

2.

[플란다스의 개]는 나른한 평일 오후와 같은 영화입니다. 소위 '사회 생활'이라는 것에 제대로 편입되지 못한 상태에서 정체되고 가라앉는 듯한 기분 때문에 고생하신 분들이라면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실 거예요. 자리잡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데에 대한 불안감이 지나칠 정도로 안온한 주변 환경과 얽혀서 빚어내는 그 붕뜬 듯한 느낌을요.

이건 단순한 평온함은 아닙니다. 반대로 소금 몇 알을 집어넣어도 부글부글 끓을 수 있는 위태로운 상태죠. 이런 상황 속에 있는 사람들에겐 정말 온갖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건 현남처럼 공상적인 영웅심리로 빠질 수도 있고 윤주처럼 비이성적인 잔인함으로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남아도는 시간이 지나치게 많고 보이고 들리는 것도 그만큼이나 많아서 주변의 사사로운 것들이 엄청나게 확대되니까요. 보통 사람들에게는 신경의 완충제 노릇을 해주는 일상의 제약이 이들에게는 없습니다.

[플란다스의 개]가 가장 효과적으로 그리고 있는 부분도 그 불안한 나른함입니다. 영화는 세밀하게 잡아낸 삶의 디테일을 능숙하게 끄집어내고 그걸 적당한 배율로 확대하고 비틀어서 이 불안한 나른함에 초현실적인 괴기함을 부여합니다. 코미디가 태어나는 순간인 거죠.

3.

이 나른하고 다소 처량한 코미디를 '블랙'으로 만드는 것은 강아지 실종사건입니다. 브리지트 바르도가 이 영화를 본다면 심장발작을 일으킬지도 모르겠어요. 이 영화의 강아지들은 정말 끔찍한 일들을 겪으니까요.

조금 도가 지나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런 잔인함 때문에 강아지 실종사건은 확대되지 않아도 충분히 자극적이니까요. 이 부분에 가면 코미디는 줄어듭니다. 그건 그 자체로도 상당히 큰 사건이거든요. '현실의 왜곡'이라는 코미디 고유의 기능이 이 부분에서는 생각만큼 힘을 잘 발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전체적 흐름 속에서 보면 별 무리가 없습니다. 특히 붕괴되어 가는 윤주의 심리를 묘사하는 도구로서는 나름대로 잘 먹히는 거죠. 초반 설명이 너무 짧고 행동의 잔인함이 지나쳐서 그 캐릭터에 쉽게 몰입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긴 하지만요.

4.

배우와 캐릭터에 대해 이야기하라고 한다면... 글쎄요. 저는 이성재가 연기한 윤주라는 캐릭터가 좀 불쾌했습니다. 원래 사랑스러운 캐릭터는 아니었지만 최소한의 공감을 끌어내는 선까지는 도달해야 캐릭터의 비극적인 아이러니가 살텐데 그것도 아니니 저로서는 어쩔 수 없는 거죠.

생각해보니 이성재가 연기한 캐릭터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조금씩 불쾌했어요. 그게 각 캐릭터의 고유 성격 때문인지, 아니면 이성재라는 배우의 매너리즘에 제 무의식을 자극하는 어떤 것이 정말 있어서였는지는 모릅니다. 전자이기를 바라지만요.

배두나의 현남은 보다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만들어지기도 했을 거고요. 심지어 배두나라는 배우의 개인적 매력도 보편적인 친근함 쪽에 더 강하게 먹히는 것 같습니다. 말이 났으니 하는 말인데, 이 배우는 어딘지 모르게 젊은 시절의 셜리 맥클레인을 연상시키는 구석이 있어요.

저로서는 현남이 윤주보다 더 많이 나오길 바랐습니다. 그랬더라면 영화가 훨씬 더 효율적인 코미디가 되었을지도 모르죠. 적어도 관객들이 더 쉽게 영화에 동화되었을 겁니다.

하여간 호오도를 떠나 두 사람은 모두 좋은 연기를 보여줍니다. 영화의 나른한 일상성에 완벽하게 적응하고 있고 각자의 캐릭터에 자신의 이미지 상표를 찍어내는 작업도 훌륭히 해냈습니다. 섬세하게 짜여진 사실적인 대사들이 그들의 연기가 걸려넘어지지 않게 도왔을테니, 각본의 도움도 받았겠지만요.

5.

이 영화의 보도자료는 [플란다스의 개]가 '2000년대의 새로운 영화'라고 자랑하고 있지만, 그건 허풍입니다. [플란다스의 개]는 결코 새로운 영화가 아니니까요. 이 영화의 진짜 가치는 '모험 정신'이나 '감각', '새로움'에 있는 게 아니라, 안전한 장르 캔버스 위에 사실적인 행동과 대사로 능숙하게 그려진 캐릭터들을 영화적으로 세련되게 포장한 코미디 속에 적절하게 융합시키는 고전적이고 안전한 방식에 있으니까요. 이게 '새로워'보인다면, 그건 우리한테 그만큼 잘 만든 코미디가 적었다는 증거일 뿐이죠.

다시 말해 [플란다스의 개]는 꽤 좋은 코미디란 말입니다. 문제가 있다면 종종 지나치게 느려지고 시간 배분이 잘못된 (특히 클라이맥스에서 결말로 이어지는 내리막길은 너무 깁니다) 영화의 흐름일텐데, 다시 생각해보면 이런 느린 흐름 때문에 캐릭터들의 일상에 갇힌 듯한 느낌이 더 잘 먹혔을 수도 있습니다. 흥행에는 도움이 안 될 요소지만요. (00/02/08)

DJUNA

기타등등

우리네 아파트 촌은 정말 황량하지 않아요? 늘 그런 생각을 합니다. 꼭 디스토피아 SF에 나오는 기계 도시처럼 보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