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알폰소 쿠아론 Alfonso Cuarón

주연
리젤 매튜스....세라 크루
Liesel Matthews....Sara Crewe
리암 커닝햄....크루 대위/라마 왕자
Liam Cunningham....Captain Crewe/Prince Rama
러스티 쉬머...아멜리아 민친
Rusty Schwimmer....Amelia Minchin
바네사 리 체스터....베키
Vanessa Lee Chester....Becky
에롤 시타할....람 다스
Errol Sitahal....Ram Dass

1.

[소공녀]는 95년에 영화화된 또다른 빅토리안 멜로드라마입니다. 여러분들 중 이 무시무시한 동화를 안 읽어보신 분들은 아마도 없을... 모르겠군요. 안데르센도 읽지 않은 사람도 본 적이 있으니까.

어렸을 때, 이 책을 읽는 걸 무척 꺼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국민학교에 막 들어간 저희들에게 [소공녀]는 끔찍하게 자극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이 극에서 극으로 달리는 살벌한 책을 보다 안전한 거리에서 즐길 수 있었던 건 훨씬 나이가 들고나서였습니다.

엄청난 멜로드라마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마어마하게 높은 곳에 있던 여주인공이 지옥 밑바닥까지 떨어지고 주변에는 사악한 선생과 학생들이 부글거립니다. 여기까지만 생각해도 공포에 질려 마땅한데 설상가상으로 하늘이 던져준 것 같은 완벽한 해피엔딩이 뒤를 따릅니다. 워너에서 만든 [소공녀]는 온 가족이 모여서 볼 수 있는 G등급이지만, 원작 그대로 만들었다면 PG-13는 각오해야 했을 겁니다.

2.

하지만, 멕시코인 감독 알폰소 쿠아론이 새로 만든 영화 [소공녀]는 아까도 말했듯이 우아하고 따뜻한 G 등급 영화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일단 실망부터 했습니다. [소공녀]의 매력은 바로 그 끔찍하게 멜로드라마틱한 상황 속에, 그리고 그에 대처하는 건방지지만 매력적인 세라 크루라는 캐릭터에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39년도에 셜리 템플 주연으로 만들어진 뮤지컬 [소공녀]는 후자 쪽을 완전히 무시해버린 영화였습니다. 영화는 템플 자체의 매력으로 충만해 있었지만 템플은 아무리 생각해도 세라 크루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세라 크루라는 이름을 빌렸을 뿐, 영화가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셜리 템플이었습니다.

쿠아론의 영화는 어떨까요? 둘 다 없습니다. 영화에는 원작을 그렇게 자극적으로 만들었던 현실의 차가운 맛이 없습니다. 세라 크루가 바닥까지 떨어져도 관객들은 그다지 무섭게 느끼지 못할 겁니다. 리젤 매튜스는 매력적인 배우지만 역시 도도하기 짝이 없는 세라 크루를 연기하기에는 너무나 현실적이고 밝습니다.

그러나, 실망하기는 아직 이릅니다. 원작 고유의 향기를 상당부분 잃은 대신 쿠아론은 그런 것들을 보상해줄 만한 다른 미덕들로 영화를 채웁니다. 쿠아론의 [소공녀]는 영화는 원작과 다른 면에서 매력적입니다.

3.

우선 원작과 다른 면들부터 따지고 넘어가야겠군요.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배경의 변화입니다. 원작은 1880년대 무렵의 런던이 무대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제1차 세계대전 중의 뉴욕이 무대입니다. 크루 대위는 전쟁 중인 유럽에서 딸을 보호하기 위해 아내의 나라인 미국으로 세라를 데려온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베키는 흑인 소녀가 되었고 아버지는 전쟁 중에 실종된 것으로 상황이 바뀌었습니다(템플 주연의 영화에서는 보어 전쟁이 배경이었습니다. 나중에도 지적하겠지만 이 영화는 템플 영화의 스토리 중 많은 부분을 차용하고 있습니다.)

배경이 바뀌면서 원작의 디킨즈식 살벌한 분위기가 사라졌습니다. 악센트만 해도 미국식 영어는 덜 무섭게 들리니까요. 1910년 대의 뉴욕도 무서운 도시지만, 30여년 전의 런던만큼 끔찍하지는 않습니다. 크루 대위도 다이아먼드 광산같은 로맨틱한 사업과는 무관합니다. 그는 크래커 회사 사장입니다.

세라 크루의 캐릭터도 변화했습니다. 원작의 세라는 도도하고 고상한, 그러나 결코 천사는 아닌 캐릭터입니다. 원작의 배경만큼 콘트라스트가 분명하고 인상적인 인물입니다. 그러나 영화 속의 세라는 보다 온화하고 정감가는 미국식 아이로 변했습니다.

결말 부분 역시, 원작보다는 셜리 템플의 영화에 더 가깝습니다. 아버지는 살아있었고 학교를 탈출한 세라는 경찰과 민친 선생으로부터 도망치다가 기억상실증에 걸린 아버지를 만납니다.

자, 이건 피상적인 비교일 뿐입니다. 이제 영화 이야기를 해보기로 할까요?

4.

영화는 세라가 이야기하는 라마 왕자와 시타 공주의 동화로부터 시작합니다. 시타 공주는 사악한 악마 라바나에게 납치당하고 라마는 탑에 갇힌 시타를 구출하기 위해 모험을 떠납니다. 이 인도풍의 이야기는 영화가 진행되는 도중 조금씩 이어지는데, 자세히 보면 크루 부녀의 역경과 조금씩 매치됨을 알 수 있습니다. 세라는 자신을 앙트와네트 왕비 대신 탑에 갇힌 시타 공주에 비교하고 시타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자신의 둘레에 원을 그리고 잠이 듭니다. 라마 왕자가 라바나의 독에 중독될 때, 크루 대위는 독일군의 독개스 공격을 받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은 컴퓨터 그래픽으로 고스란히 시각화되었고 그 자체만으로도 즐길 만합니다.

시타와 라마의 모험담은 이 영화의 주제와 곧바로 연결됩니다. 이 영화에서 세라 크루는 카렌 블릭센과 대항해도 될 만큼 엄청난 이야기꾼입니다. 저녁에 민친 선생이 지루한 에드워드 왕조식 소설을 읽으라고 하자 그녀는 책을 무시하고 그 이야기를 자기 특유의 활달한 모험담으로 끌어갑니다. 그녀가 민친 학교의 학생들을 매료시킨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 입담과 상상력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면서 세라 크루와 미스 민친과의 대립은 원작에 없는 새로운 깊이를 부여받게 되었습니다. 미스 민친이 세라 크루를 증오하는 이유는 그녀가 그냥 못된 구두쇠였기 때문이 아니라 세라가 그녀의 세계를 위협하는 엄청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상식과 질서가 중심인 그녀의 세계는 분명히 세라가 추구하는 자유롭고 풍요로운 상상력으로 가득 찬 세계와 맞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 둘은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영화는 이 두 세계의 전쟁을 분명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민친은 철저하게 패배합니다. 영화 [소공녀]는 원작보다는 [비밀의 화원]에 가깝습니다. 영화 [소공녀]는 메마르고 죽어있던 한 세계를 상상력의 마술로 꽃피우는 한 소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5.

[소공녀]는 모든 장면을 스튜디오에 세트를 세워놓고 만든 구식 영화입니다. 개인적으로 저희 둘 다 이런 영화를 무척 좋아합니다. 하지만 촬영 감독 엠마누엘 루비츠키는 이런 세트들에 걸맞는 비현실성을 충분히 구현하지 않습니다. 화면은 간결하고 분명해서 머천트-아이보리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이 자체로의 매력도 있지만, 파웰과 프레스버거 식의 몽환적인 화려함이 이 멜로드라마에 더 적절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나, 영화의 미술 부분에는 정말 아낌없는 칭찬을 보내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보 웰치의 팬이라면 이 영화를 한 번 빌려다 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특히 매력적인 곳은 세라의 다락방인데, 웰치는 여기에서 로맨틱함과 삭막함의 절묘한 혼합을 보여줍니다.

패트릭 도일도 웰치만큼 큰 부분을 담당했습니다. 그 사람 특유의 과대 망상은 없습니다. 대신 그는 인도풍의 선율과 어린이 합창으로 섬세하고 매력적인 음악을 끄집어 냈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쉽게 CD를 구할 수 없겠지요. 유감입니다.

캐스팅은 잘 되어있습니다. 리젤 매튜스는 원작의 세라 크루와는 전혀 다르지만 나름대로 새롭고 매력적인 캐릭터를 구축했습니다. 아직 완전히 닦여지지 않은 배우입니다만, 기대할 여지는 충분합니다. 다른 아역들도 각 역할에 충실합니다.

결론지어 말하자면, 이 영화는 [소공녀] 원작의 향취를 맡고 싶으신 분들에게는 실망스러울 수도 있지만 영화 자체만 따진다면 꽤 좋은 부분이 많은 영화입니다. 제피렐리의 [제인 에어]보다 점수를 더 주고 싶군요.

아, 그래도 누군가가 진짜로 끔찍한 멜로드라마로 이 원작을 영화화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96/02/01)

D&P

기타등등

[소공녀]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에 대한 저희의 예측은 틀렸습니다. 이제는 꽤 구하기 쉬운 CD 중 하나니까요. 다행이라고 해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