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김지운

주연
임수정....수미
문근영....수연
염정아....은주
김갑수....무현
박미현....친엄마
우기홍....선규
이승비....미희
이대연....의사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그것도 잔뜩...)

수미와 수연

듀나 [장화, 홍련]은 정신병원에 입원한 한 여자 환자의 회상으로 시작됩니다. 시작부터 영화는 페어플레이를 하고 있는 거죠. 이 첫 장면을 통해 우린 중요한 몇몇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 이어지는 이야기를 그대로 믿어서는 안된다는 것. 둘, 등장하는 사람들 역시 보여지는 그대로가 아니라는 것.

아마 시작부터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장르 공식에 익숙한 관객들 중 중간 중간에 밝혀지는 결말에 정말로 놀라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거예요. 프롤로그가 이야기의 발전 가능성을 서너가지 정도로 줄여버리니까요.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장르의 발전 과정 중 다른 영화들이나 소설들을 통해 이미 탐구되었던 것들이죠.

파프리카 전 그게 영화의 단점인 것 같진 않네요. 어차피 대부분의 장르 공식들은 재활용품들이니까요. 쇼킹한 결말을 노리는 트릭들도 마찬가지고요.

결정적으로 이런 '진부함'은 스토리의 서스펜스도 크게 줄이지는 않아요. 아까도 그쪽에서 말했잖아요. 스토리의 발전 가능성이 줄어들긴 했지만 하나로 줄어든 건 아니라고요. 관객들이 점점 줄어가는 가능성들을 저울질해가는 동안 영화는 고유의 서스펜스를 쌓아올립니다.

듀나 네, 저도 그게 큰 단점이라고 말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 영화의 각본에 아주 찬성하는 건 아니지만요.

파프리카 줄거리를 이야기해볼까요...

듀나 영화가 시작되면 수미와 수연이라는 자매가 시골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버지는 최근에 은주라는 젊은 여자랑 결혼했고 새엄마와 자매 사이는 그렇게까지 좋은 편이 아니죠.

이들이 집으로 들어오면서 이상한 일들이 하나씩 일어납니다. 위층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침대 너머로 수상쩍은 여자의 그림자가 지나가고 시꺼먼 머리칼로 얼굴을 덮은 여자 유령이 꿈에 나타나는 식이죠. 그러는 동안 자매와 새엄마의 사이는 점점 폭력적으로 변해갑니다.

물론 관객들은 이 모든 일들이 온전하지 못한 정신을 가진 한 여성의 회상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파프리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영화의 분위기가 자기만의 힘을 얻지요. 관객들은 시작부터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압니다. 이야기의 아귀가 맞지 않고 이야기꾼이 분명히 뭔가 숨기고 있으니까요. 영화는 의도적으로 그런 엇갈림을 조금씩 조금씩 늘려가고 결국 클라이맥스에서 그나마 남아있던 현실의 허울은 완전히 파괴됩니다.

그러는 동안 관객들은 이중의 서스펜스를 제공받습니다. 하나는 아까도 말한 미스터리에 기반한 서스펜스이고, 다른 하나는 완전히 아귀가 맞지 않은 우주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원초적인 불안이지요.

듀나 네, 그렇긴 하지요. 이 영화는 분위기나 내용상 [더 헌팅]과 같은 고전적인 '귀신들린 집' 영화들보다 로만 폴란스키의 [리펄션]에 더 가깝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각본엔 몇 가지 심각한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걸 이야기하려면 이야기의 결말을 폭로해야 하는데...

파프리카 해요. 어차피 스포일러 경고 때문에 다들 도망갔을텐데요.

수미와 은주

듀나 좋아요. 하죠. 이 영화는 두 사람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두 생존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정신질환자인, 수미와 수연의 엄마는 옷장 안에서 자살했고 수연은 그런 엄마를 구하려다 옷장에 깔려 죽었죠. 수미와 은주는 수연을 구할 수 있었지만 둘 사이의 감정 싸움 속에서 그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영화의 이야기는 동생과 어머니의 죽음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수미가 겪는 경험담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수미는 자신과 은주 역할을 모두 하고 (어떻게 보면 둘은 공범자니까 말이에요) 환상 속에서 수연을 살려냅니다. [장화, 홍련]은 도널드 카우프먼이 쓴 [3]의 호러 버전이에요. 주인공, 악당, 희생자가 모두 한 사람인 영화니까요.

첫번째 문제는 균형입니다. 영화는 전적으로 수미의 시점에서 전개되는데, 그러는 동안 은주의 고통은 방치되고 있어요. 이런 불균형은 두 실질적인 공범자의 고통이라는 주제에서 살짝 어긋나 있습니다. 우린 후반부에 진짜 은주의 고통과 경험 역시 알게 되지만 그 정도만으로는 부족해요.

그러나 진짜로 큰 문제는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입니다. 네, 정신질환을 소재로 한 추리물은 흥미로운 틀입니다. 하지만 영화가 지나칠 정도로 그 틀에 얽매어 있으면 안되지요. 어느 순간에 그 틀을 벗어던지고 자기 힘으로 날아야 합니다.

하지만 [장화, 홍련]은 진상이 밝혀지는 부분부터 오히려 힘이 떨어져 버립니다. 그건 밝혀야 할 진상이 그렇게까지 어려운 것이 아니어도 설명하는 건 상당히 복잡하기 때문이지요. 영화는 수미가 세 역을 모두 상상했다는 것 말고도 왜 그 아이가 그런 파국에 빠졌는지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 결과 영화의 후반은 모두 긴 설명이 되어 버리지요. 명탐정의 마지막 강의처럼요.

이 구성의 가장 큰 문제점은 드라마의 결말이 있어야 할 자리에 설명이 대신 들어앉아 있다는 것입니다. 설명은 중요해요. 하지만 설명만으로 이야기가 끝난다면 그건 특정 정신질환 케이스에 대한 보고서가 되고 맙니다. 이런 자극적인 이야기 속에서 관객들은 어느 정도 감정적인 힘이 있는 진짜 결말을 요구하기 마련입니다. 그게 파국의 절정이건, 희망의 싹이건 말이에요.

원래 설정이 흥미로운만큼 복잡하기도 했어요. 저에게 특별히 더 나은 해결책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영화가 정서적으로 미완성인 채 끝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파프리카 [장화, 홍련]은 김지운의 전작인 [조용한 가족]과 [메모리즈]의 요소들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조용한 가족]처럼 고립된 집을 무대로 하고 있지만 [메모리즈]처럼 유머가 적고 죄의식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지요.

전체적으로 영화는 상당히 자극적입니다. 네, 사용하는 도구들 자체는 특별할 게 없답니다. 머리칼로 얼굴을 가린 여자 유령 (사다코가 정말 후배 유령들을 버려놨죠), 정체를 알 수 없는 발자국 소리, 삐걱거리며 열리는 문...

듀나 몇몇 진부한 도구들은 그 사용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공포 영화용 깩깩 소음은요. 요샌 그런 식의 영화 음악을 들을 때마다 꼭 그렇게 관객들을 억지로 자극해야할 필요가 있는지 궁금해져요.

파프리카 네, 하지만 그것들은 여전히 효과적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얼굴을 가린 유령은 여전히 무섭습니다. 등을 돌린 정체불명의 존재 역시 마찬가지고요. 호기심과 공포를 반반씩 느끼며 무언가 끔찍한 것이 기다리고 있는 곳에 들어가는 주인공의 모습엔 여전히 가슴 졸이는 무엇이 있습니다. 이 모든 건 어둠에 대한 공포처럼 원초적인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들은 그냥 공포 자극용 도구 이상입니다. 그 이상의 내용이 담겨 있지요. 머리칼로 얼굴을 가리고 목을 조른 올가미의 끝을 잡아당기는 유령은 공포스러운 대상임과 동시에 미스터리의 복선이기도 합니다. 영화의 이런 자극들은 일종의 암호들이고 바로 그 감추어진 진실 때문에 더 공포스럽기도 합니다.

무현, 수미, 수연, 은주

듀나 따지고 보면 그런 암호화도 공포 영화의 기본 도구일 겁니다. 유령들은 "나는 헨리 8세의 몇 번째 아내다!"라고 소리치며 다니지 않지요. 이들은 모두 흔적이며 단서이며 암호입니다. 그런 신비스러움을 뺀다면 유령들에게 무슨 힘이 있겠어요?

제 눈에 가장 잘 들어왔던 건 타이밍과 속도감이었습니다. 영화는 느긋한 페이스와 일종의 레가토를 얄밉게 구사하고 있었지요. 분명히 존재하는 공포의 대상을 몇 초 뒤에 놓은 뒤, 그 목적지로 끊어지지 않고 느긋하게 이어지는 액션을 연출하는 것이죠. 심지어 영화는 그 공포의 대상에 접근한 뒤에도 관성 비행이라도 하는 것처럼 비슷한 속도를 유지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그 침대 위의 귀신입니다. 어떻게보면 김빠지기 쉬운 수법이었는데, 결과만 본다면 아슬아슬한 자극과 그 뒤의 허탈한 웃음까지 꽤 잘 이어진 편이었어요.

장치들 자체가 노골적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감추어져 있는 것에 대한 공포감과 불안은 상당히 잘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적어도 이것들은 제대로 된 이론에 바탕을 둔 것이었죠. 특히 은주와 수미가 끌고 다니는 자루가 그랬습니다. 이것도 참 얄밉죠. 순전히 껍질만으로 이루어진 존재였으니 말이에요.

파프리카 전 전체적인 세트의 분위기가 좋았습니다. 시대가 불분명한 꿈 속의 공간 같았어요. 집은 20세기 초에 지어졌고 가전 제품들은 80년대 것들이며 가구들은 모두 유럽풍의 골동품들이었지요. 하여간 전체적인 분위기는 20세기 초중엽에 가까웠어요. 조금은 무국적이고 고립된 느낌이 이 보편적인 가족 갈등 공포물에 어울렸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늘 좁은 복도와 계단이 시야를 가로막는 집의 구조도 공포물에 어울렸고요.

듀나 무국적은 아니었어요. 노골적으로 일본풍이었지요. 무대가 되는 집 자체가 일본식 저택이었죠. 유럽풍의 가구나 식기들이 일본식 저택 안에서 만들어내는 분위기도 상당히 일본식이었어요. 신경질적인 스토리나 전체적으로 풍기는 소녀애 취향, 이병우의 음악도 그랬고요.

영화가 좋으면 일본풍이어도 상관없죠. 하지만 이런 접근법이 영화의 개성을 많이 죽인 것 같아요. 툭하면 모방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니까 말이에요.

파프리카 배우들은...

듀나 대충 기능적이었죠. 심리물이지만 정말 복잡한 연기를 할 장면들은 생각외로 적었잖아요. 배우들은 모두 과장된 타입들을 연기했고 그게 바로 이 영화의 의도였지요. 하지만 전 그런 연기에서도 조금 더 상세한 디테일을 바랐던 것 같습니다.

파프리카 이미지가 다들 대충 맞는 것 같아요. 전 염정아의 억지로 꾸민 듯한 느낌이 조금 거슬렸었는데, 이 영화에서는 그게 오히려 역에 잘 맞았더라고요. 임수정과 문근영도 역에 맞고 특별히 거기에서 벗어나는 일도 없었지요.

근데 임수정과 염정아는 정면 얼굴은 전혀 다르지만 실루엣은 비슷하지 않아요? 몇몇 장면에선 영화가 의도적으로 그걸 이용한 것 같기도 하고.

듀나 슬슬 결론을 내 볼까요...

파프리카 이게 김지운의 두번째 공포 영화인가요? 아니면 세번째? 네번째? [메모리즈]를 독립된 하나의 영화로 치느냐, [조용한 가족]과 [커밍아웃]을 공포 영화로 치느냐에 따라 답은 달라지겠지요. 하여간 그가 공포 영화라는 장르에 품고 있는 꾸준한 관심은 분명하고 그가 지금까지 쌓아올린 스타일도 서서히 고유의 모양을 잡아가고 있군요. 그리고 요새 분위기를 보면 이 장르와 연관된 그의 작업이 [장화, 홍련]에서 끝날 것 같지는 않아요. (03/06/05)

D&P

기타등등

영화를 보면서 전 감독에게 발 페티시가 있는 게 아닌가하고 계속 생각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