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니콜라스 레이 Nicholas Ray

주연
모린 오하라....마리안 워시번
Maureen O'Hara....Marian Washburn
멜빈 더글러스....루크 조던
Melvyn Douglas....Luke Jordan
글로리아 그레이엄....수잔 콜드웰(에스트렐리타)
Gloria Grahame....Susan Caldwell(Estrellita)
빌 윌리엄스....리 크렌쇼
Bill Williams....Lee Crenshaw
빅터 조리....브룩 매튜스
Victor Jory....Brook Matthews
메리 필립스....메리 파울러 부인
Mary Philips....Mrs. Mary Fowler
제이 C. 플리펜....짐 파울러 형사
Jay C. Flippen....Police Insp. Jim Fowler

수잔의 데뷔

[그랜드 호텔]의 원작자인 비키 바움의 소설 [Mortgage on Life]를 각색한 니콜라스 레이의 영화 [여인의 비밀]은 니콜라스 레이가 그가 데뷔한 1949년에 내놓은 세 편의 영화들 중 하나입니다. 아마 그 중 가장 인기가 없는 영화일 수도 있겠어요. [그들은 밤에 산다]와 같은 걸작은 당연히 아니고 [Knock on Any Door]처럼 레이의 개성이 분명히 산 영화도 아니니까요. 여기서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보통 수준으로 한 고용감독 이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여인의 비밀]은 오히려 허먼 맨키위츠의 영화처럼 보입니다. 적어도 맨키비츠 형제들 중 한 명이 각본을 맡은 영화임은 거의 분명하죠. 분열된 회상들로 스토리를 쌓아올리는 수법이나 냉소적이고 쿨한 화자 캐릭터들은 [시민 케인]이나 [이브의 모든 것]과 유사하니까요. [여인의 비밀]이 나온 바로 그 다음 해인 1950년에 허먼의 동생 존 맨키위츠가 [이브의 모든 것]을 발표했는데, 그 때문에 대조가 더 분명해지기도 합니다. [이브의 모든 것]은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절 최대 걸작 중 하나지만 [여인의 비밀]은 아무리 잘 봐주려고 해도 그냥 그런 평작에 불과하거든요.

[여인의 비밀]은 라디오 가수인 수잔 콜드웰(에스트렐리타)이 총에 맞아 쓰러지면서 시작됩니다. 사고 당시 같은 방에 있었던 수잔의 후견인인 마리안 워시본은 자신이 수잔을 쏘았다고 주장하지만 마리안의 친구인 음악가 루크 조던은 그 말을 믿지 않죠. 루크는 담당 형사인 파울러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마리안의 고백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밝혀내려고 합니다.

괜찮은 설정이죠? 설정에 살을 입혀주는 루크의 회상도 괜찮습니다. [이브의 모든 것] 느낌이 강하긴 하지만 심하지는 않습니다. 강하다고 해도 먼저 나온 영화이니 단점은 아닐 거고요. 하여간 이 이야기에서 마리안은 목소리를 잃은 가수이고 수잔은 스타가 되고 싶어하는 시골 출신 아가씨입니다. 마리안은 루크와 함께 수잔을 스타로 키워내지만 심한 성격차 때문에 갈등을 겪죠.

슬프게도, 이 이야기는 영화 속에서 제대로 발전하지 못합니다. 곧장 말해 마리안과 수잔의 이야기는 영화가 사전에 깐 미스터리의 설정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던 거예요. 이런 식의 미스터리엔 기대를 충족시키거나 넘어설 수 있는 진상과 결말이 필수적인데, 아무리 멜로드라마를 꾸며봐도 영화의 결말은 도입부에 맞는 힘이 없습니다. 수잔과 마리안의 갈등도 그냥 성격 맞지 않는 사람들의 실랑이 이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요. 총에 맞은 수잔이 살아남아 해피엔딩이 될 게 분명한 상황이라 루크와 파울리의 수사는 서스펜스를 잃습니다. 결정적으로 마리안의 희생적인 행동은 끝까지 이해불능으로 남습니다. 아무리 영화를 돌이켜 봐도 그 사람이 그렇게 거창하게 굴어야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단 말이에요. 모든 게 너무 헐렁해서 영화가 다 끝나고 나면 진짜 진상이 어딘가 숨어 있고 감독과 검열관이 우리로부터 그걸 은폐하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랍니다.

영화의 내용 뿐만 아니라 분위기와 장르도 흔들립니다. 영화는 컴컴한 필름 느와르로 시작됩니다. 여기서 [이브의 모든 것] 식 멜로드라마로 넘어가는 것 정도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추리소설광인 파울러 부인이 탐정 흉내를 내며 사건 현장을 들쑤시는 장면이나 너무 발랄해서 어처구니 없는 결말로 이어지는 건 좀 심했지요. 영화는 정말로 진지한 영화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이죽거리는 농담 같지도 않습니다.

다행히도 모린 오하라, 멜빈 더글러스, 글로리아 그레이엄이 선보이는 뛰어난 연기는 어색한 각본과 그만큼이나 어색한 결말을 많이 커버해줍니다. 특히 미니 이브 해링턴을 연기한 글로리아 그레이엄은요. 앤 박스터 대신 글로리아 그레이엄이 [이브의 모든 것]에서 이브를 연기했어도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05/02/23)

DJUNA

기타등등

당시 글로리아 그레이엄은 니콜라스 레이의 아내였습니다. 둘의 결혼 생활은 그렇게 잘 풀리지 않아서 이 영화를 찍을 당시엔 별거 중이었다고 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