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박기형

주연
심혜진....미숙
김진근....도일
문우빈....진성
박웅....김교수
정나윤....민지
이영희....미숙모
민혜령....도희
정희태....성준

1.

진성

[아카시아]는 거의 인공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깔끔한 전원주택가에서 시작됩니다. 직물공예가인 미숙과 산부인과의사인 남편 도일은 10년 동안 평온한 결혼생활을 했지만 아직 아기가 없습니다. 둘은 고민 끝에 보육원에서 에드바르트 뭉크와 채널링이라도 하는 것처럼 컴컴한 나무 그림들만 반복해서 그리는 5살 소년 진성을 입양합니다. 내성적인 진성은 뜰에 있는 아카시아 나무에 이상할 정도로 집착하고 그 집착은 미숙이 임신한 뒤로 점점 더 심해지지요. 그리고 어느 폭풍우치던 날 진성이 사라집니다.

2.

[장화, 홍련]에 '가족괴담'이라는 딱지가 붙은 것처럼 [아카시아]에는 '잔혹가정극'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습니다. 전체적인 이야기의 분위기만 계산한다면 [아카시아]는 [장화, 홍련]과 [4인용 식탁]의 중간쯤에 놓여 있습니다. 차갑고 냉정한 이미지로 멀끔한 중산층 가정의 이미지 밑에 숨은 균열을 찾아내려는 영화의 의도는 [4인용 식탁]과 같지만 정작 그 도구로 사용되는 이야기는 [장화, 홍련]처럼 극도로 양식화된 장르 미스터리거든요.

3.

미숙

입양은 호러 영화의 기성품 소재 중 하나입니다. 보통 시점을 누구의 눈에 맞추느냐에 따라 둘로 나뉘죠. 순진한 어린 주인공이 무시무시한 집에 입양되어 고생을 하거나, 평범한 부부가 수상쩍은 아이를 입양해서 곤욕을 치르거나. 입양이라는 게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갑자기 가족 행세를 한다는 거니 호러 영화 소재로는 딱이죠.

[아카시아]는 두 가지 모두 다루고 있습니다. 영화는 대부분 심혜진이 연기한 미숙을 따라가고 있지만 영화가 끝날 때까지 등장인물들 사이에 분명한 선악의 구분은 그어지지 않습니다. 진성은 가끔 섬뜩한 짓을 하긴 하지만 우리가 쉽게 타자화시킬 수 있는 단순한 괴물은 아닙니다. 진성의 양부모들도 완전히 결백한 사람들은 아니지만 역시 괴물은 아니고요. 관객들이 볼 수 있는 것은 일련의 우연과 인간적 약점들이 쌓여 형성된 운명의 힘이 끔찍한 피투성이 비극으로 주인공들을 몰아가는 과정입니다. [아카시아]는 운명비극입니다.

많은 비평가들은 이 영화의 사회비판적 요소를 지적하지만 전 그게 그렇게까지 중요한 것 같지 않습니다. 제삿밥 받아먹기 위해 필사적인 유교사회의 강박관념은 이 영화에도 언급되지만 곧 잊혀지지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영화의 주인공들이 저지른 일들을 보편적인 비판의 도구로 이해할 수 있을만큼 관객들이 결백한 존재라고 생각되지는 않아요.

4.

진성의 그림

[아카시아] 각본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반전을 다루는 방식에 있습니다. 영화는 후반부의 반전을 무언가 굉장하고 새로운 것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그만큼이나 후반부의 반전에 힘이 실려 있지요. 하지만 호러나 미스터리 장르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이 영화의 진상은 거의 사지선다형 시험 문제 같아서 대단한 놀라움을 줄 정도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반전은 순수한 반전으로 남는 대신 극적 요소의 일부로 활용되어야 하는데, 각본은 여기에서도 아주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이 반전이 강한 비극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한 사람만은 자신의 감정을 완전히 관객들에게 노출시켜야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쿨한 반무표정함을 고집하며 자신의 감정을 클라이맥스까지 숨기고 있어요. 후반부 반전을 위한 도구지만 결국 드라마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답니다.

반전을 감추기 위해 영화도입부부터 뿌려놓은 가짜 단서들도 문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받아들이다보면 관객들은 대부분 실제 진상보다 더 대단한 것들을 기대하기 마련이라 영화가 끝난 뒤에도 쉽게 만족하지 못하니 말이에요. 저같으면 전반부는 정직한 드라마로 만들고 후반부를 공포 영화로 끌어가거나 초반부의 분위기에 맞는 다른 결말을 찾아봤을 겁니다.

5.

도일

[아카시아]는 국내에서는 오래간만에 만들어진 와이드스크린 호러 영화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엔 박기형의 전작 [여고괴담]이나 핏빛으로 물든 포스터에서 사람들이 연상할만한 '와이드스크린 바로크'의 자극은 크지 않습니다. 반대로 영화의 이미지는 차분하게 탈색되어 있고 폭력적인 클라이맥스 직전까지는 도회적인 세련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또는 유지하려 하고 있습니다.)

클라이맥스에 도달하면 지금까지 아카시아의 하얀색과 함께 유지되었던 무채색의 차분함이 깨어지고 붉은 색의 폭력이 터져나옵니다. 미숙의 태피스트리를 이용한 붉은 이미지의 효과는 좋지만 그와 병행하는 폭력이 조금 더 강도를 더했으면 더 좋았을 거예요. 특히 후반부의 설정은 거의 다리오 아르젠토식이라 그에 걸맞는 선혈낭자한 잔인함이 필요했어요.

아카시아 나무를 괴물화시키는 데에도 조금 더 머리를 쓸 필요가 있었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나무라는 대상을 괴물화시키는 건 분명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이 영화에서는 너무 단순하게 생각한 것 같아요. 중반에 나오는 [페노미나]식 개미 살인 장면도 너무 쉽게 넘어간 것 같습니다. 진짜 개미를 이용해 고생했다곤 하지만 컴퓨터 그래픽을 본격적으로 이용해서 박진감을 조금 더 주는 편이 나았을 겁니다. 영화에 나오는 정도로는 믿음도 안가고 충격도 덜하거든요. 그래도 최후의 일격은 꽤 괜찮았지만요.

6.

진성과 민지

괜찮은 배우들이 평균 이상의 연기를 보여주지만 아주 좋은 연기 소재를 제공해준 영화같지는 않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복잡하기보다는 덤덤하고 혼란스러워요. 두 아역 배우들도 조금 더 잘 이용할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도 나쁘지는 않지만요.

에릭 사티와 에드바르트 그리크의 기존 음악을 이용한 선곡은 대부분 영화의 차가운 분위기와 잘 맞습니다. 하지만 클라이맥스 장면에 나오는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 편곡은 그렇게까지 좋았던 것 같지 않아요.

진성이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는 장면에서 [샤이닝]과 [오멘]의 이미지를 발견한 건 저뿐이 아닐 겁니다. 나무와 전원주택가를 묘사하는 방식에서 [폴터가이스트]의 흔적이 조금 보였는데 그건 우연인지.

누군가는 깽깽거리는 호러 영화용 효과음이 언제나 먹힌다고 말했지만 이젠 슬슬 지치기 시작합니다. 몇몇 장면들은 차라리 침묵이 더 효과적이었을 거예요.

지금까지 계속 투덜거렸지만 전 여전히 [아카시아]가 좋은 영화였다고 생각합니다. [아카시아]는 좋은 호러 영화에 필수적인 기술적 완성도와 야심, 좋은 주제를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르겠어요. 모든 게 정말 괜찮을 수도 있었던 선에 도달하기 바로 그 직전에 멈추버린 것 같단 말이에요. (03/10/10)

DJUNA

기타등등

우리가 아카시아라고 부르는 나무는 사실 진짜 아카시아가 아니라 미국산 아까시나무입니다. 그렇다면 영화의 영어 제목도 [Acacia]대신 [Locust Tree]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냥 생각해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