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막스 파버뵉 Max Färberböck

주연
마리아 슈라더....펠리체 슈라겐하임 (야구아)
Maria Schrader....Felice Schragenheim (Jaguar)
율리안네 쾰러....릴리 부스트 (아이메)
Juliane Köhler....Lilly Wust (Aimée)
요한나 볼카렉....일제
Johanna Wokalek....Ilse
하이케 마카치....클라첸
Heike Makatsch....Klärchen
엘리자베트 데겐....로테
Elisabeth Degen....Lotte
데틀레프 뷕....귄터 부스트
Detlev Buck....Günther Wust
잉게 켈러....릴리 부스트 (1997)
Inge Keller....Lilly Wust (1997)
키라 믈라덱....일제 (1997)
Kyra Mladeck....Ilse (1997)

1.

펠리체와 릴리

릴리 부스트는 동부 전선에 나가 있는 게쉬타포 장교 남편 사이에서 네 아들을 둔 가정 주부입니다. 펠리체 슈라겐하임은 낮에는 신분을 숨기고 취직한 나찌 신문사에서 일하고 밤에는 지하 운동을 하는 유태인 저널리스트입니다. 서로의 대척점에 서 있다시피 한 이 두 사람은 베를린 폭격이 한창이던 1943년에 처음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집니다. 두 사람의 사랑은 너무 깊어서, 펠리체는 탈출 기회가 왔는데도 릴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언제 나찌 경찰이 들이닥쳐 그녀를 강제 수용소로 보낼지도 모르는데도 말이에요.

아마 제가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릴리와 펠리체의 이야기를 들었다면 내용의 비현실성에 기겁했을지 모릅니다. 통속적인 로맨스의 효과에 집착하느라 스토리나 설정의 당위 따위는 신경 쓰지도 않은 것 같은 이야기니까요. 과연 펠리체 같은 드라마틱한 인물이 릴리처럼 생각없는 가정주부와 그처럼 격정적인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요? 아무리 사랑이 좋다고 해도 목숨이 오락가락 하는 상황 속에서 펠리체처럼 똑똑한 사람이 그렇게 어처구니 없는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이 이야기는 실화입니다. 펠리체 쉬라겐하임은 죽었지만 릴리 부스트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릴리 부스트의 회상을 바탕으로 한 실화 소설 [아이메와 야구아]는 전세계적인 베스트셀러였고요. 이 소설을 영화로 각색한 작품이 바로 오늘 제가 이야기할 영화 [아이메와 야구아]입니다. (아이메와 야구아는 펠리체와 릴리가 서로에게 붙여준 애칭입니다.)

2.

정말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걸까요? 물론이죠. 많은 사람들에게 삶은 사실주의 소설보다는 통속 연애물에 더 가깝습니다. 당연하지 않겠어요? 실제 세계는 비현실성을 트집잡을 독자나 비평가들을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예술적 당위성에 대해 신경 쓸 필요는 더더욱 없고요. 사람들은 종종 캐릭터 설정지에 없는 행동을 하고 많은 일들은 별다른 설명 없이 그냥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정말 흥미로운 것은 실화를 전달하는 방식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영화는 꽤 재미있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아이메와 야구아]는 펠리체의 옛 여자 친구이고 릴리 아이들의 보모였던 일제의 회상으로 시작됩니다. 당연히 릴리를 바라보는 일제의 시선이 고울 리가 없죠. 일제의 눈으로 본 릴리는 멍청하고 생각 없으며 싸구려 로맨티시즘에 젖어 있는 바람둥이 유부녀에 불과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릴리와 펠리체의 사랑이 무르익는 동안 슬쩍 릴리의 시점으로 바뀌어 전달되는 것이죠.

릴리같은 뻔한 아줌마가 펠리체라는 로맨틱한 연인을 만난 뒤로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게 이 영화의 줄거리니까 이런 도입부는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사람이 바뀌어도 릴리는 여전히 로맨틱한 환상을 품은 아줌마입니다. 더 현명해지지 못한 것도 분명하고요. 관객들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릴리가 펠리체를 결코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거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습니다. 영화 속의 펠리체는 실제 펠리체라기 보다는 사랑에 빠진 릴리 부스트가 필사적으로 재생시킨 판타지입니다.

결국 영화는 릴리가 쓴 단순한 로맨티시즘의 안경을 통해 이 모든 사건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일제의 시점은 릴리가 펠리체의 정체를 알아내기 이전에 펠리체가 겪은 모험을 이야기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지만 릴리의 로맨티시즘을 예고하고 관객들로 하여금 사건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통로이기도 하죠. 물론 관객들이 이런 영화를 보면서도 객관적이고 싶어한다면 말입니다만.

전 그렇게 객관적이고 싶지 않습니다. 적어도 영화를 볼 때는요. 릴리의 시점을 넘어 펠리체 슈라겐하임이라는 사람에 대해 더 알고 싶기는 합니다. 릴리가 더듬더듬 묘사한 것만 봐도 굉장히 흥미로운 인물이었음이 분명하니까요. 하지만 [아이메와 야구아]가 지닌 열병과도 같은 강렬한 로맨스는 그렇게 쉽게 거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 릴리가 도배한 로맨티시즘의 베일을 애써 벗기고 싶지 않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 수용소에서 죽은 연인을 맘에 품고 반 세기를 견뎌낸 릴리 부스트 할머니의 실제 모습을 보면 더욱 그렇고요.

3.

[아이메와 야구아]는 단도직입적인 로맨스입니다. 몽환적으로 치장된 폭격 이미지들만 봐도 이 영화가 작정하고 만든 2차 세계대전 러브 스토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비난이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전 원래 이렇게 폭격과 호르몬이 뒤섞인 전쟁 로맨스에 쉽게 넘어가는 편이잖아요.

영화는 릴리와 펠리체의 이야기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이상의 야심은 없습니다. 전 그럴 필요도 없었다고 봅니다. 러브 스토리를 이야기할 때 필요 이상의 야심을 동원하면 일을 그르칠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냥 이야기만 들려주는 편이 더 효과적이죠.

마리아 슈라더와 율리안네 쾰러가 연기한 두 연인들의 묘사는 흥미롭습니다. 배우로서도 한 번 도전해볼 만한 역들이었을 거예요. 둘의 이야기는 로맨틱하기 짝이 없지만 그들의 캐릭터들은 뻔한 로맨티시즘에 묻힐만큼 진부하지는 않습니다. 역시 실화의 장점이겠죠. 둘 중 펠리체를 연기한 슈라더 쪽에 더 시선이 갑니다. 연기도 좋았지만 캐릭터가 훨씬 흥미진진해서겠지요.

4.

[아이메와 야구아]는 좋은 러브 스토리지만, 역시 이 영화의 진짜 힘은 '실화'라는 딱지에 나옵니다. 그 때문에 DVD 서플에 실린 사진과 편지들이 영화만큼이나 감동적인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특히 둘의 입술 자국으로 마감한, 릴리와 펠리체가 쓴 낡은 결혼 서약서를 보면 괜히 가슴이 찡해집니다. (01/12/04)

DJUNA

기타등등

마리아 슈라더와 율리안네 쾰러는 이 영화로 베를린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