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샘 멘데스 Sam Mendes

주연
케빈 스페이시....레스터 번햄
Kevin Spacey....Lester Burnham
아네트 베닝....캐롤린 번햄
Annette Bening....Carolyn Burnham
도라 버치....제인 번햄
Thora Birch....Jane Burnham
웨스 벤틀리....리키 피츠
Wes Bentley....Ricky Fitts
미나 수바리....안젤라 헤이즈
Mena Suvari....Angela Hayes
피터 갤러거....버디 킹
Peter Gallagher....Buddy King
크리스 쿠퍼....피츠 대령
Chris Cooper....Colonel Fitts
앨리슨 재니....바바라 피츠
Allison Janney....Barbara Fitts
스코트 바쿨라....짐 #1
Scott Bakula....Jim #1
샘 로바즈....짐 #2
Sam Robards....Jim #2

1.

레스터 번햄은 시시한 직장에 십여 년 이상 박혀 있는 중년 남자입니다. 부동산업자인 아내 캐롤린과의 부부관계는 고인 물처럼 썩어가고 있고 하는 일은 싫으며 세상 어디에도 살맛나는 일이 없습니다. 유일한 낙 비슷한 것은 아침 샤워 때 하는 자위 행위. 그뒤로는 모두 내리막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레스터는 딸의 친구인 금발 머리 치어리더 안젤라를 본 뒤로 정신이 휙 돌아버립니다. 안젤라에 넋이 나간 그는 운동을 시작하고 회사를 때려치우고 새 차를 사고 심지어 마리화나까지 피우기 시작하더니...

에헴... 우린 이런 이야기를 전에도 보지 않았던가요? 네, 보았습니다. 수도 없이 보았지요. 미국의 중산층 백인 중년 남자들은 결코 대변인이 부족한 부류가 아닙니다. 그들이 겪는 소외감, 판타지, 위기감들은 모두 어디선가 영화나 소설의 소재로 변형되었습니다.

조금 진지해지려고 하는 헐리웃 영화들이 소재를 찾으러 머리를 들이미는 부분도 바로 [아메리칸 뷰티]의 터였습니다. 허울 좋은 중산층의 껍데기 속에서 썩어가는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는 늘 관객들에게 직접적으로 어필했고 아카데미 용으로도 좋았으며 제작비도 적게 들었습니다. [보통 사람들]과 같은 영화들은 작품상까지 받았지요.

그렇다고 이런 이야기들이 더 이상 만들어지지 말아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는 늘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 하는 법이며, 또 90년대 말의 미국 가족은 [보통 사람들]이 다루었던 80년대 가족과는 다른 방식으로 고통받고 있으니까요.

2.

[아메리칸 뷰티]가 다른 중년의 위기 영화와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기본 뼈대는 새롭지 않습니다. 레스터 번햄의 고민은 몇십 년 전부터 그의 선배들이 겪어왔던 것들입니다. 네, 그의 부부 생활은 당연히 위기 상황입니다. 딸 또래의 어린 여자에 눈이 먼 것도 그가 처음은 아닙니다. 이런 막다른 길에서 미친 것처럼 돌파구를 찾으려고 난리치는 것도 정해진 순서입니다. 그의 주변 인물들, 아내 캐롤린, 딸 제인, 제인의 남자 친구 리키와 같은 캐릭터들도 이전에 다 한 번씩 어딘가 다른 영화나 소설 속에서 등장했을 법한 인물들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이 전형적인 이야기를 아주 새로운 이야기처럼 만들어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 이 뻔한 이야기가 이렇게 낯설고 신선하게 보이는 걸까요?

일부는 영화의 스타일 때문이기도 합니다. 영화적 테크닉 자체는 새롭다고 할 수 없을는지 몰라도, 이런 중년의 위기 영화에 이처럼 적절하게 90년대의 디지탈 특수 효과와 새로운 스타일이 결합된 적은 없었습니다. 그 결과 영화는 우리가 예전부터 알고 있던 이야기의 새로운 측면을 드러내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도구일 뿐입니다. 천장에 박힌 안젤라의 누드를 감싼 장미 꽃잎들은 강렬한 시각적 인상을 제공해주지만, 그 장면이 강렬한 것은 그런 비주얼을 정당화하는 시각 때문입니다. 레스터에게 이 장면은 자위 행위용 판타지 이상입니다. 그것은 '아름다움'입니다. (왜 실리콘 유방에 홀려 [플레이보이]지를 넘기는 아저씨들 역시 '아름다움'의 탐구자라는 사실이 제 머리 속에 떠오르지 않았던 걸까요?)

하여간 예상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욕정에 불타는 중년 아저씨의 성적 환상과 '아름다움'이라는 보편적 가치가 합쳐지자 영화는 시가 되기 시작했으니까요. 이 영화를 채운 중년의 위기 클리셰들은 여기서부터 더 이상 클리셰가 아닙니다. 모든 것들이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고 다시 태어나기 시작합니다.

[아메리칸 뷰티]에는 어딘지 모르게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작품들을 연상시키는 탐미적인 특성이 있습니다. 그건 레스터가 미성년자를 탐하는 중년 남자여서만은 아닙니다. 진부하고 천박한 싸구려 삶 속에서 아름다움의 쾌락을 찾아내는 방식 때문이지요. 탐미적인 국외자였던 나보코프 주인공들과는 달리 레스터는 막 심미안이 깨어나기 시작한 내부인이지만요.

레스터의 길 건너편에는 조금 다른 식으로 같은 길을 가고 있는 리키라는 친구가 있습니다. 파트 타임 마약 상인인 이 틴에이저는 레스터와는 달리 예술가입니다. 그 예술이라는 것이 캠코더로 옆집 여자 아이를 몰래 훔쳐보는 것이긴 하지만요. 하여간 레스터와 리키는 정신적인 쌍둥이입니다. 레스터가 천박한 치어리더의 얼굴에서 장미 꽃잎을 끄집어낸다면, 이 피핑 탐은 바람에 휘날리는 비닐 봉지와 함께 춤을 춥니다.

그들이 어디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건, 이 이야기는 단순한 중년의 위기를 넘어서서 갱생과 부활이라는 보다 보편적이고 거의 종교적이기까지 한 큰 이야기로 발전했습니다. 주제가 커짐과 함께 이야기의 차원도 더 커진 것이지요. 죽은 자의 나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선셋 대로]식 나레이션도 단순한 이죽거림 이상입니다. 이 영화에서 죽음은 거의 기독교식으로 이중적입니다. 레스터는 죽지만 그는 그 과정에서 오히려 죽은 것이나 다름없던 생활에서 벗어나 진짜 생명을 찾은 것입니다.

3.

[아메리칸 뷰티]는 훌륭한 코미디이기도 합니다. 그것도 기가 막히게 웃기는 코미디죠. 이 영화의 캐릭터들이 겪는 모험과 수난이 코미디 이외의 형태로 표현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영화는 교묘하게 스토리의 비극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사실 영화의 희극성이 주제의 비극성을 강화하죠. 비극과 희극을 모순 개념으로 착각하고 있던 모 대학 교수한테 이걸 좀 보여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생각해보면, 고전적인 영웅이라는 것들이 없어진 요새, 가장 친밀한 방식으로 비극을 그려낼 수 있는 방법은 코미디밖에 없습니다. 영웅들의 자리를 밀어낸 평범한 사람들은 작고 우스꽝스러우니까요. 그들에게 거창한 비극성을 부여하면 오히려 코믹하게 보입니다. 코미디야말로 가장 솔직한 비극의 도구인 거죠.

[아메리칸 뷰티]의 코미디는 그 솔직성에서 나옵니다. 다 늙은 나이에 딸 또래 여자 아이한테 넋이 나가는 남자는 당연히 우스꽝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걸 진지하게 그린다면 그게 바로 사기인 거죠.

샘 멘데스는 레스터를 가짜 진지함으로 장식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를 작위적인 코미디로 밀어붙이지도 않습니다. 사실 그가 만들어내는 화면은 얄미울 정도로 안정적이고 균형이 잡혀 있으며 정적입니다(팬 앤 스캔 버전 비디오는 이 영화의 와이드 스크린이 만들어내는 정적인 느낌을 망쳐놓을 겁니다.) 케빈 스페이시라는 배우 역시 극히 최소한의 연기만으로 모든 걸 표현해내는 배우고요. [아메리칸 뷰티]의 코미디는 지극히 '미니멀'합니다. 하긴 그 때문에 가끔 튀어나오는 파격이 더 튀는 것이겠지만요.

이런 정적인 느낌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은 앨런 볼의 유려한 각본입니다. [아메리칸 뷰티]는 볼의 첫 장편 영화 각본이지만, 능글맞을 정도로 능란합니다. 두 가족의 멤버를 자유롭게 오가면서 이들의 삶을 완벽한 대위법으로 짜맞추는 솜씨는 혀가 돌아갈 지경입니다. 후반부의 파국은 조금 작위적이지만 구성과 트릭은 그 작위성을 용서할만큼 잘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볼의 각본에는 단순히 잘된 각본 이상의 것이 보입니다. 이 작품에는 '위대한 미국 소설'이라는 익숙한 표현에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어떤 것이 있습니다. 순진하게 여기서 정말 어떤 위대함까지 바랄 필요는 없겠지만, 이 지극히 미국적인 충족감을 거부하는 것은 그네들에겐 결코 쉽지 않았을 겁니다. 사람들이 이 영화를 아카데미로 끌고가려고 하는 것도 그 때문이겠지요.

4.

케빈 스페이시를 빼놓고서 [아메리칸 뷰티]를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스페이시는 [아메리칸 뷰티]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절제된 연기 스타일, 차가운 영리함, 균형 감각은 바로 이 영화의 스타일 그대로입니다. 흔히들 쓰는 '이 연기를 위해 태어났다'라는 표현 있지 않습니까? 영화를 보면 이 표현이 이처럼 잘 맞을 수가 없습니다.

아네트 베닝은 이보다 조금 더 여유로운 연기를 보여줍니다. 보다 호들갑스럽고 열려있지요. 스페이시와 베닝의 연기 스타일은 적당히 충돌하면서도 근사한 화음을 만들어냅니다.

웨스 벤틀리, 미나 수바리(이 배우는 작년을 두 편의 '아메리칸' 영화로 때워버린 것 같군요,) 도라 버치와 같은 젊은 배우들 역시 그들한테서 기대할 수 있는 이상적인 연기를 보여줍니다. 호모포비아에 빠진 전직 해병대 장교를 근사하게 연기한 크리스 쿠퍼를 잊어서는 안되겠지만요.

5.

[아메리칸 뷰티]가 사람들이 바라는 것처럼 '위대한 미국 영화'로 남을까요?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졸업]도 고전이 되었는데, [아메리칸 뷰티]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레스터 번햄이 [세일즈 맨의 죽음]의 윌리 로만과 같은 고전적 캐릭터로 남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답해줄 수 있을 겁니다. 미래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건 훌륭하다고요.

하여간 드림웍스는 작년에 이어 아카데미 작품상을 탈 수 있는 근사한 기회를 잡은 셈입니다. 이번엔 정말로 탈지도 모르겠어요. (00/02/10)

DJUNA

기타등등

1. 영화에서는 제니의 어린 시절을 묘사하기 위해 도라 버치의 원래 어린 시절 사진과 다른 아역 배우를 이용한 영화 클립을 뒤섞고 있습니다. 뭐랄까, 조금 혼란스럽더군요.

2. 같은 이름을 가진 동성애 커플을 등장시키는 것도 이젠 고정된 게이 유머가 된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