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메리 해런 Mary Harron

주연
크리스찬 베일....패트릭 베이트먼
Christian Bale....Patrick Bateman
클로에 세비니....진
Chloë Sevigny....Jean
윌렘 드포....도널드 킴볼
Willem Dafoe....Donald Kimball
리즈 위더스푼....에블린 윌리엄즈
Reese Witherspoon....Evelyn Williams
사만다 마티스....코트니 롤린슨
Samantha Mathis....Courtney Rawlinson
재러드 레토....폴 앨런
Jared Leto....Paul Allen
기네비어 터너....엘리자베스
Guinevere Turner....Elizabeth
조시 루카스....크레이그 맥더못
Josh Lucas....Craig McDermott
맷 로스....루이스 캐러더즈
Matt Ross....Luis Carruthers
윌리엄 세이지....데이빗 반 패튼
William Sage....David Van Patten
카라 세이모어....크리스티
Cara Seymour....Christie
저스틴 테로....티모시 브라이스
Justin Theroux....Timothy Bryce
스티븐 보가트....해롤드 칸즈
Stephen Bogaert....Harold Carnes
모니카 마이어....데이지
Monika Meier....Daisy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개인적으로 기네비어 터너의 팬이라고 자처하는 편이고 [나는 앤디 워홀을 쐈다]를 본 이후로 메리 해런의 차기작을 기다렸던 터라, 전 두 사람이 한 패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반가웠답니다. 둘이 뭉치면 뭔가 재미있는 게 나올 것 같았어요.

그런데 그들이 처음으로 선택한 계획은... 뭐랄까... 아주 괴상했습니다. 잔혹한 폭력과 여성 혐오로 가득 찬 브레트 이스턴 엘리스의 악명 높은 소설 [아메리칸 사이코]의 영화 버전이었으니까요. 터너나 해런의 전작을 고려하면 뭔가 심각하게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해런과 터너는, 원작이 잘못 이해되고 있다, 소설 속의 살인 장면들은 대부분 영화화되지 않을 것이다,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사태를 수습하려 들었지만 이미 마음을 굳힌 반대자들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습니다. 유출된 시나리오의 일부에 잔혹한 살인 장면이 담겨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사태는 더 심각해졌지요.

그러다 모든 게 엉뚱한 방향으로 꺾어졌습니다. [타이타닉]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스타가 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인공 패트릭 베이트먼을 연기하겠다고 자청했던 것이죠. 해런이 주연 배우로 찍어놨던 크리스찬 베일은 그 즉시 뒤로 밀려났고(베일 팬클럽 회원들의 증오섞인 절규를 상상해보세요) 심지어 해런의 감독직도 위태위태했습니다. 이렇게 되다가는 올리버 스톤 감독,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메이저 영화가 될 판이었죠.

사태는 디카프리오가 베이트먼 역을 포기하자 순식간에 원상태로 돌아왔습니다. 베일은 돌아왔고 해런과 터너도 자기 위치를 찾았습니다. 디카프리오 소동 덕에 이익도 꽤 많이 생겼죠. 홍보 효과도 짭짤했지만, 사악한 할리우드 스타의 개인적 야심에 희생당할 뻔한 인디 영화라는 꽤 긍정적인 이미지도 얻었으니까요. 개봉전에 반대자들의 기운이 조금이라도 꺾였다면 아마 그 때문일 겁니다.

2.

[아메리칸 사이코]라는 소설은 왜 그렇게 격렬한 반대에 휩쓸렸을까요? 소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인공 패트릭 베이트먼은 월 스트리트에서 일하는 27세의 잘생긴 청년으로, 멀끔한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게, 뱃속에 살인마를 숨겨놓고 있습니다. 이 친구는 결국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살인충동을 억누르지 못하고 수십명의 사람들을 잔인하게 살해하죠. 살인이 거듭될수록 충동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지고...

원작이 그렇게 욕을 먹었던 이유는 메시지 자체보다는 부분부분의 묘사와 태도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심지어 이 작품을 옹호하고 영화화하려고 했던 해런과 터너 콤비도 각본을 쓰는 도중 이 작품의 묘사에 이를 갈며 툭하면 작가 욕을 해댔다고 하니까요.

그렇다면 이 작품의 메시지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여성에 대한 폭력 옹호나 여성 혐오와는 상관 없는 듯 합니다. 엘리스의 목적은 이 작품이 나왔던 당시 한껏 제 물 만난 듯 설치고 다녔던 베이트먼과 같은 여피 족들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었습니다. 베이트먼은 그런 종류의 여피족들을 극도로 추하게 비튼 캐리커쳐와 같은 존재였죠. 아마 해런과 터너가 소설에서 보았던 가능성도 바로 이 메시지였을 겁니다.

해런과 터너가 맨 처음 한 일은 그 메시지가 분명해지게 모양을 잡는 것이었을 겁니다. 영화는 잔혹한 살인 장면을 대부분 삭제하고 코미디를 늘렸습니다. 그 덕택에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빚어지는 비판의 대부분은 영화 버전에서는 의미를 잃었죠. 이 영화가 등급 문제를 일으켰던 진짜 이유는 살인 장면 때문이 아니라 베이트먼이 두 여자와 함께 섹스를 하는 장면 때문이었습니다.

그 결과 [아메리칸 사이코]는 해런과 터너가 자랑스럽게 '페미니스트 영화'라고 주장할만한 어떤 작품이 되었습니다. 적어도 이 영화에는 [나는 앤디 워홀을 쏘았다]를 감독한 사람이 내보낸 듯한 유쾌한 남성 혐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많은 관객들은 공격 범위를 베이트먼이 속해있는 여피 남성들로 제한하거나, 레이건 당시의 탐욕스러운 미국 사회쯤으로 고쳐 잡겠지만 말입니다.

하여간 이 영화에서 베이트먼과 그의 친구들은 굉장한 조롱감입니다. 물론 그들은 보기엔 멀끔한 사람들이에요. 젊고 잘 생겼으며 돈도 많고 비싼 옷을 걸쳤고 늘 좋은 식당에서 식사하는 사람들이지요. 하지만 조금만 안을 들여다보면 아까 나열한 겉모습이 그들의 전부라는 걸 알게 됩니다. 심지어 그들은 일도 하지 않습니다. 사무실에서 하는 거라곤 팝송을 들으면서 야한 잡지나 뒤적거리는 것이니까요. 겉만 멀끔하고 아무런 쓸모도 없는 친구들이 엄청난 돈을 벌면서 으스대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의 겉꾸밈도 대단치 않습니다. 모두들 잘 차려입은 친구들이지만 다들 서로와 너무 닮았어요. 심지어 자기네들도 서로를 잘 구별하지 못하니까요. 베이트먼을 포함한 이 여피 일당들은 아이비 리그에서 제조한 복제인간들 같습니다. 심지어 월렘 드포가 연기한 사립 탐정까지도 그래요. 영화에 나오는 여성 캐릭터들이 분명한 자기 개성을 가진 독립적인 존재들로 묘사되는 걸 생각해보면 이런 야유는 보다 보편적인 대상을 향하고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질 수 있죠.

영화는 정말 확실하게 이들을 놀려대려고 작정했습니다. 패트릭 베이트먼의 긴 화장 장면부터가 웃음감이지요. 가장 웃기는 장면은 이들의 명함 대결입니다. 네 명의 자칭 비즈니스맨이라는 친구들이 서로의 명함을 비교해보며 자존심 대결을 해대는 장면은 정말 황당하게 웃기지요.

베이트먼의 살인 동기도 사실 여기서 나옵니다. 베이트먼은 속이 텅 빈 친구이기 때문에 그의 행동 동기는 얼마 남지 않은 겉꾸밈에서 나옵니다. 그는 자기는 예약을 못했던 식당에 예약에 성공했다는 이유만으로 친구를 살해하고, 자기보다 더 좋은 명함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친구를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속에 뭐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인간적 감정으로 머리가 바쁘겠지만, 그 친구의 머리 속에는 짜증과 분노밖에 없습니다. 이게 터지자 그는 살인범이 됩니다.

살인 장면도 코미디입니다. 베이트먼은 가방에 시체를 담고 나오다 친구들에게 들키지만 친구들이 신경쓰는 것은 가방의 상표입니다. 베이트먼은 툭하면 80년대 팝송에 대해 거창하지만 그만큼이나 공허한 연설을 해대는데, 그 역시 베이트먼이라는 인간의 지적 공허함을 근사하게 증명해주는 예가 됩니다. 역시 황당하게 웃기는 건 마찬가지고요. 아, 그리고 베이트먼이 친구 폴을 죽일 때 휘두르던 도끼도 잊을 수 없죠. 그 살인무기는 너무나도 완전무결하게 깔끔하고 세련되어 보여서 마치 캘빈 클라인 매장에서 특별 주문해 가져온 것 같습니다!

결정적으로 우스운 것은 심지어 이 살인들마저도 베이트먼이라는 흐릿한 인물의 존재를 강화시켜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후반부에 필사적으로 자신의 범죄를 알리려 하지만 아파트에 쌓여 있던 수많은 시체들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못합니다. 영화가 끝날 무렵에도 그는 여전히 다른 사람들로 오인당하는 무명의 여피 족에 불과합니다. 어떻게 보면 그는 그가 살해했던 수많은 사람들보다 더 죽어 있는 사람이죠.

3.

[아메리칸 사이코]는 '반 슬래셔 무비'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의 소재는 잔인하기 이를 데 없지만, 정작 해런은 이 잔인함을 화면 전면에 끄집어 낼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해런은 사람들이 이런 종류의 영화에서 기대하는 사도매저키스틱한 쾌락을 의식적으로 배제하고 있습니다. 관객들은 베이트먼이 과감하게 첫 살인을 저지르는 광경을 보고 싶어하지만, 영화가 시작되었을 무렵엔 이미 베이트먼은 살인자가 된 뒤입니다. 우리가 그의 살인을 눈치채게 되는 건 그가 세탁소에서 얼룩진 세탁물을 갖고 싸우고 있을 때니까요. 그나마 있는 살인 장면들도 간접 묘사로만 일관하고요. 슬래셔 무비를 기대하고 왔던 수많은 사람들은 실망했을 거예요.

하지만 바로 그게 해런이 노리고 있는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영화는 베이트먼을 조롱하는 것만큼이나 슬래셔 무비 팬들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영화는 피에 굶주린 관객들의 욕구를 의식적으로 좌절시키면서 약을 올리는 듯 합니다.

그리고 이런 방식은 메시지 전달에도 적합합니다. 이런 소재를 다루는 영화는 소재의 선정성과 자극성에 매달리다가 정작 길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아메리칸 사이코]에는 그런 부분이 거의 없거든요. 무척 영리한 선택이었던 셈이죠.

4.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정말로 베이트먼을 연기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형편없었을 겁니다. 베이트먼은 디카프리오처럼 꺅꺅팬과 에고로 무장한 배우가 연기할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니에요. 베이트먼에게 필요한 것은 정반대의 것, 즉 자기 변명이나 과장없이 용감하게 이미지를 구길 수 있는 자세와 익명성입니다.

그리고 크리스찬 베일은 기가 막히게 그 모든 것들을 해냅니다. 아마 그가 성인 시절에 해낸 최초의 일급 연기일 거예요. 해론의 눈은 정확했습니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맞는 배우였어요.

베일을 제외한 다른 남자 배우들은 그렇게 눈에 뜨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게 바로 그들의 임무였으니 그들도 훌륭하게 자기 일을 해낸 셈이죠.

여자 조연 배우들은 남자 조연 배우들보다 더 연기하는 재미를 누리고 있습니다. 사만다 마티스, 리즈 위더스푼, 기네비어 터너, 클로에 세비니와 같은 배우들은 모두 단순하긴 하지만 그럴싸한 캐릭터들을 배분받고 있습니다. 특별히 복잡한 연기가 필요한 캐릭터들은 아니었지만 모두 인상이 강한 편이죠.

[아메리칸 사이코]는 수많은 소문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상업적으로 성공한 작품은 아닙니다. 내용의 불쾌함이 지나치게 과장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실제로는 일반 수준의 호러 영화보다 덜 불편하고 꽤 재미있기도 한 작품이니 말입니다. (00/07/17)

DJUNA

기타등등

기네비어 터너의 등장부분은 터너의 팬들만 웃을 수 있는 요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일단 터너가 연기한 엘리자베스는 터너처럼 사라 로렌스 대학 출신입니다. 게다가 이 친구는 '나는 레즈비언 따위는 아니야' 어쩌구를 외치다가 결국에는 베이트먼이 데려온 금발 머리 창녀와 섹스를 한답니다. :-) 자기도 각본 쓰면서 재미있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