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웨인 왕 Wayne Wang

주연
수잔 서랜든....아델 어거스트
Susan Sarandon....Adele August
나탈리 포트먼....앤 어거스트
Natalie Portman....Ann August
보니 베델리아....캐롤
Bonnie Bedelia....Carol
숀 헤이터시....베니
Shawn Hatosy....Benny
하트 보크너....조시 스프리처
Hart Bochner....Josh Spritzer
캐롤린 애런....게일 레터파인
Caroline Aaron....Gail Letterfine
코빈 앨러드....피터
Corbin Allred....Peter
존 디엘....지미
John Diehl....Jimmy
폴 길포일....조지 프랭클린
Paul Guilfoyle....George Franklin

1.

이 페이지에 자주 오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전 소위 'chick flick'이라는 경멸 섞인 명칭으로 불리우는 여성 관객용 영화들에 대해 몰래 호감을 품고 있습니다. 그건 여름 블록버스터 영화들에 대해 제가 품고 있는 감정과 비슷합니다. 뻔한 영화들이라고 투덜거리면서 계속 보러 가게 되는 거죠.

아마 이런 영화들에서 제가 바라는 것은 일종의 안정감일 겁니다.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폭발과 액션으로 적당량의 아드레날린을 분출시켜 준다면, 이런 'chick flick'들은 눈물과 포옹이 뒤섞인 감정으로 관객의 감상을 적당히 자극해 주며 호르몬 대용 역할을 해주죠. 저한테 블록버스터가 마약이라면 'chick flick'들은 항우울제 쯤 됩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한테 큰 기대를 하지 않는 것처럼, 이런 종류의 'chick flick'에 큰 기대를 얹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블록버스터 영화에 일정 수준 이상의 특수 효과와 액션이 있는 것처럼, 'chick flick'들에도 좋은 배우들의 안정된 연기와 인상적인 캐릭터와 같이 충분히 하한선을 높일만한 것들이 있습니다. 생각없이 취향의 중심축을 세우고 영화관에 들어가거나 비디오를 빌릴 이유가 있는 셈이죠.

2.

6, 70년대에 젊은 시절을 보냈던 베이비 부머 시대 사람들이 모두 '기성 세대'로 성장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열풍은 결코 한 때 흘러가는 젊은이들의 열광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게 아니었죠. 아직도 수많은 베이비 부머들이 마음만은 새파란 젊은이들로 남아 설치며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가까운 예로 저 클린턴 아저씨를 보세요.

그 결과 불쌍해지는 것은 그들의 자식 세대들입니다. 히피 세대 부모들로부터 '리프'니 '스타'니 하는 황당한 이름을 받은 것은 둘째로 치더라도, 도대체 어른이 될 생각을 하지 않는 부모를 대신해서 엉뚱한 책임감까지 대신 느껴야 하니까요.

80년대와 90년대에 그렇게 많은 역할 전환 가족물이 나왔던 것도 그 때문입니다. 보수적인 아들과 진보적인 부모가 충돌하는 [패밀리 타이] 시리즈는 그래도 정상적인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AbFab] 시리즈나 [텀블위즈]와 같은 영화들에서는 사정이 좀 더 심각해지죠. [패밀리 타이]의 엘리스와 스티븐은 책임감 넘치는 훌륭한 부모들이었지만, [AbFab]나 [텀블위즈]의 엄마들은 책임감의 철자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처럼 보이니까요.

3.

[여기보다 어딘가에]의 아델과 앤 모녀도 그런 식입니다. 딸인 앤은 조숙하고 지적이며 신중합니다. 하지만 엄마인 아델은 대책없는 낙천주의자에다 몽상가이며 철이 덜 들었습니다.

이런 모녀 콤비가 위스콘신의 시골 마을을 벗어나 캘리포니아의 로스 앤젤레스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아델에게는 매우 부모다운 훌륭한 목표가 있긴 합니다. 딸에게 더 좋은 미래를 선사해주려는 거죠. 하지만 아델이 선택한 방법은 현실적인 부모가 택할만한 것이 아닙니다. 딸을 오디션에 내보내 텔레비전 스타로 만들려 하니까요.

당연히 이들의 충돌은 불가피합니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별다른 스토리 없이 모녀의 미묘한 대립만으로 이야기를 끌어갑니다. 대립 중 가장 노골적으로 재미있는 부분은 물론 역할 전환극입니다. 딸인 앤은 엄마인 아델보다 훨씬 부모다워 보이니까요. 종종 영화는 순수한 역할 전환을 이용한 코미디를 선보입니다. 삐쳐서 가출한 엄마를 찾아 온 동네에 전화를 걸어대는 딸의 모습은 결코 흔히 볼 수 있는 구경거리가 아니지요.

물론 완벽한 역할 전환은 불가능하고 또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앤은 여전히 부모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는 딸이고, 아델은 앤을 통해 자신의 소망을 실현하려고 하는 어머니입니다.

그 결과 기존 역할극과 역할 전환극이 흥미롭게 뒤섞이면서 다양한 변주를 만들어냅니다. 모녀의 전투 역시 훨씬 치열해지고요. 일단 둘은 정신적인 면에서 거의 동등한 편이니까요. 사실 딸이 조금 위지만, 자잘한 걸 더하고 빼면 둘의 수준은 비슷하죠.

이런 스토리에 재미를 더해주는 것은 아델과 앤의 생생한 캐릭터입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엄마인 아델이죠. 대책없이 낙천적이고 로맨틱하지만 정작 목적지인 베벌리 힐즈의 파티는 겁이 나서 못 들어가는 사람, 딸을 부모로서 사랑하지만 자매로서 의지하는 사람, 주변 모든 사람들을 트러블로 몰고 가지만 정작 싫어하기는 어려운 사람. 한동안 심각하기만 했던 수잔 서랜든한테서 이처럼 속이 후련해질 정도로 유쾌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니 정말 즐거웠습니다.

상대적으로 앤 역의 나탈리 포트먼은 절제되고 신중한 연기를 보여줍니다. 서랜든의 아델에 비해 작아보일 수도 있는데, 영화를 보면 그런 것도 아니군요. 오히려 앤의 냉정한 차분함은 종종 아델을 능가할 때도 있습니다. 포트먼의 섬세하고 영리한 틴에이저 연기는 너무 자연스러워서, 연기가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정말 그냥 자기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을지도 모르죠.

이들의 연기는 모나 심슨의 베스트 셀러 소설을 군더더기 없이 날씬하게 각색한 앨빈 서전트의 각본의 도움을 받습니다. 서전트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chick flick'인 [줄리아]의 작가이기도 하죠. 긴 시간에 걸쳐 여성 캐릭터들의 섬세한 충돌을 묘사하는 그의 장기는 이 작품에도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웨인 왕의 연출은 점점 그의 개성을 잃어가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chick flick'을 만들어내는 그의 실력은 점점 세련되어가는 듯합니다. 그의 다음 행보를 지켜봐야겠어요. (00/06/24)

DJUNA

기타등등

책임감 없는 엄마라고 했지만, 그래도 아델은 꽤 쉽게 일자리를 얻는 것 같더군요. LA의 취직란은 생각보다 덜 끔찍한 모양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