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이정향

주연
심은하....춘희
이성재....철수
안성기....인공
송선미....다혜

1.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식찬란한 관료들에 의해 끌려가는 이 나라 문화 행정 속에서 [덤앤 더머] 뺨치는 저질 코미디를 발견하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국립 현대 미술관의 과천 이전도 그 저질 코미디 중 하나였지요. 국립 미술관을 놀이공원 부속 기관으로 만든다는 게 온전한 정신의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일입니까?

그러나 그런 일은 정말로 일어났고 우린 아직도 현대 미술관에 가기 위해 코끼리 열차를 타야 합니다. 우리 후손들은 이런 바보 짓을 보고 또 한번 어리석은 조상들을 비웃겠지요.

2.

그래도 [미술관 옆 동물원]에서 과천 현대 미술관과 동물원은 꽤 그럴싸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춘희와 철수가 주인공인 현실 세계에서는 두 주인공의 관계를 설명하는 적절한 상징이 되어주고, 다혜와 인공이 주인공인 시나리오 속에서는 그럴싸한 배경이 되어주니까요. 이 이중의 역할 속에서 과천이라는 배경은 상당히 구체적인 힘을 발휘하는데, 구체적인 장소가 이 정도의 비중으로 이용되는 한국 영화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돌대가리 문화 행정 관료들이 어쩌다가 한 점 딴 것입니다.

3.

[미술관 옆 동물원]을 보고 있노라면 '창의성'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 영화는 '창의적'인 작품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작품을 '창의적'이라고 한다면, 그건 그 작품이 어떤 사람도 생각하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것을 창조해냈기 때문이 아닙니다. 잘 사용되지 않지만 그래도 유용한 도구들을 발굴해 효율적으로 이용했다면 우린 대충 그 작품이 '창의적'이라고 합니다.

[미술관 옆 동물원]은 엄청나게 독창적인 작품은 아닙니다. 현실 세계의 남녀가 자기들의 이야기를 반영한 예술 작품을 만든다는 이야기 정도는 다른 영화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그 유용성에 비해 잘 사용되지 않고 있으므로, 늘 뻔한 이야기만 되풀이 하고 있는 다른 멜로드라마들과 비교해보면 분명히 눈에 들어옵니다.

이런 '창의성'에는 에너지 절약의 측면도 있습니다. '창의적인' 이야기와 뻔한 이야기를 가지고 같은 수준의 영화를 만든다고 생각해봅시다. '창의적인' 영화가 훨씬 쉽게 만들어집니다. 물론 여러분이 아주 실력이 좋다면 극도로 뻔한 이야기만 가지고도 [밀회]와 같은 걸작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노엘 카워드나 데이빗 린도 [밀회]를 만들 때보다는 [유쾌한 영혼]을 만들 때 훨씬 일이 손쉬웠을 겁니다.

'창의적'이 되는 게 어렵지 않느냐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약간의 브레인스토밍만 따라준다면 전체적인 노동량은 '창의적인' 영화 쪽이 훨씬 적답니다. 특히 경험이 적은 시나리오 작가라면 '창의성'쪽에 신경을 더 쓰는 것이 유리하지요.

4.

두 남녀가 어쩌다 만나서 티격태격하다가 사랑에 빠진다는 뻔한 이야기를 나름대로 입체적으로 보이게 만든 첫 번째 공신은 바로 그 '창의성'입니다. 따라서 이정향은 상당히 현명한 선택을 한 것이죠.

그러나 이 시나리오가 설정이 제시한 가능성을 모두 이용했는가에 대해선 의문이 많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은 춘희와 철수가 쓰는 시나리오입니다. 그들이 쓰고 있는 시나리오는 그들의 경험과 소망이 반쯤 투영된 것이므로 그들의 현실 모습과 어느 정도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상당히 기대되는 도입부에도 불구하고 춘희와 철수가 쓰는 [미술관 옆 동물원]은 심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 영화의 일차적인 목적이 이정향 감독 심은하, 이성재 주연의 [미술관 옆 동물원]이라는 영화의 구성에 봉사하는 것이므로 영화 자체가 꼭 재미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춘희와 철수의 시나리오는 도입부에서 모든 것을 다 펼쳐놓고 어떤 발전도 없습니다. 이것은 문제입니다. '본 영화에 봉사'라는 가장 기초적인 의무를 충분히 수행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극 중 영화는 보다 직접적이고 다양한 방식으로 춘희와 철수의 삶에 침투하며 영향을 주어야 했습니다. 영화에서 보여준 달콤한 소망 충족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앞의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영화의 후반부가 늘어진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정향의 시나리오는 사실 상당히 도전적입니다. 이 영화에서 구체적인 '캐릭터'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두 명 밖에 없습니다. 이 두 명을 뻔한 설정 안에 가두어 넣고 뻔하지 않은 이야기를 만들려면 정말 할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을 다 동원해야 합니다. 이정향은 주인공들이 쓰는 시나리오라는 방법을 동원했고 그 방법의 도입은 분명히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도입'만으로 모든 게 해결될 만큼 세상이 쉽지는 않습니다. 특히 이렇게 단순한 구도 속에서는 말입니다. :-(

5.

'둘을 맺어주는 결말'과 그 결말로 이야기를 끌어가는 공식이 지나치게 작위적인 것도 후반부의 에너지를 떨어뜨리는 걸림돌이 됩니다.

결말이 '관습적'이어서 그런 건 아닙니다. 대부분의 관습적 결말은 알고 보면 최선의 해결책일 때가 많습니다. 문제는 그런 결말로 끌어가는 과정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가입니다.

이정향은 멜로 드라마의 기본 점수를 따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춘희와 철수는 서서히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관객들은 별 무리없이 그것을 받아 들입니다. 여기까지는 됐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춘희와 철수를 공식적 결말 속으로 몰아붙이는 과정까지 관객들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결말이 불만족스러운 것은 두 주인공의 성격과 이정향이 선택한 '관습적 결말'로 가는 마지막 단계가 잘 맞는 것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고민을 했으면 좋았을 걸 그랬습니다.

6.

[미술관 옆 동물원]의 가장 큰 장점은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아니라 캐릭터들의 리얼리티와 그 리얼리티를 구체화시키는 디테일입니다.

특히 춘희는 상당한 걸작입니다. 이정향은 늘 춘희의 모델이 자기라고 이야기하고 돌아다녔는데, 그 말을 믿어도 될 것 같습니다. 그 캐릭터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죠. 아주 자잘한 디테일들, 그러니까 한참 어두컴컴한 곳에서 작업하다가 다른 사람이 불을 켜주니까 '야, 됐다'하고 혼자 좋아하는 꼴이나, 철수가 나가자 컴퓨터를 쓸어보고 (비교적) 깨끗해진 자기 발바닥을 들여다 보는 꼴을 보면 정말 경험이 있구나 하는 소리가 절로 나요. 가끔가다 껌광고 카피 같은 대사들이 나와 현실성을 떨어뜨리지만 춘희같은 사람은 현실 세계에서도 정말로 그런 말을 하고 돌아다닐 거예요.

이 칠칠치 못한 캐릭터를 '귀엽게' 만든 것은 요새 생각 외로 잘나가는 배우 심은하인데, 여기엔 이미지 배반이 주는 효과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심은하가 지금까지 품고 있던 껌광고와 같은 이미지가 춘희라는 지저분~~하게 현실적인 캐릭터와 충돌하면서 플러스 효과를 내기 때문이죠. 게다가 연기도 상당히 늘었어요. 이 영화를 보기 직전에 HBS에서 재방송하는 [M]을 보아서 더 그런 생각이 드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M]에선 정말 끔찍했죠.

이성재는 심은하보다 기본기가 닦인 연기를 보여주고 철수의 캐릭터도 상당히 좋습니다. 그러나 춘희 쪽이 더 영향력이 강한데, 그건 철수라는 캐릭터가 춘희라는 캐릭터에 어느 정도 종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춘희라는 캐릭터를 먼저 만들고 그에 대조되는 캐릭터로 철수를 만들었을테니 당연하겠지요.

인공 역의 안성기는 지금까지 나온 영화들 중 가장 커피 광고 같은 연기를 보여주고 다혜 역의 송선미 역시 껌광고 같은 이미지로 일관합니다. 하지만 원래 영화가 그런 걸 의도했었으니 문제는 없습니다. 단지 현실 세계의 다혜는 대사가 너무 뻣뻣해서 [순풍 산부인과]보다 어설프게 느껴질 지경입니다.

7.

이정향이 앞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 것인지는 예측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처녀작은 대표작이므로 큰 기대를 하지 않는 편이 좋을 때가 많죠. 그러나 [미술관 옆 동물원]에는 기성품 멜로 드라마에서 찾아볼 수 없는 어떤 향취가 스며있고 그건 이정향이 이 진부한 영화 산업 안에서도 상당히 뼈대있게 굴 수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고로 기대치를 약간 높여도 될 것 같아요. 저희는 기대를 머금은 별 셋을 주겠습니다. (99/01/04)

D&P

기타등등

영화 중반에, 춘희가 철수의 뒤를 이어 자기 원고 타이프를 하는 장면이 나오죠. 그 장면을 유심히 보았는데, 춘희는 그 신에서 자판을 딱 네 번 칩니다. 먼저 독타로 두 자를 톡톡 친 다음에 '<-' 키를 눌러 그 두 자를 싹싹 지우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