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오시이 마모루 Mamoru Oshii

주연
말고르자타 포렘니악....애쉬
Malgorzata Foremniak....Ash
블라디슬라프 코발스키....게임 마스터
Wladyslaw Kowalski....Game Master
예르지 구데이코....머피
Jerzy Gudejko....Murphy
다리우스 비스콥스키....비숍
Dariusz Biskupski....Bishop

[아발론]의 시대 배경은 가까운 미래입니다. 이 세계의 젊은이들은 암울한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불법적인 가상 현실 전투 게임인 아발론에 몰두하고 있죠. 소문에 따르면 이 게임에는 최고수들만 접근할 수 있는 클래스 SA 레벨이 있는 모양인데, 여기에 도전한 사람들은 모두 미귀환자가 되어 식물인간 신세가 되어 버린다는군요. 영화는 우리의 주인공 애쉬가 정체불명의 클래스 SA에 접근하려는 과정을 보여주며 106분을 끌고 갑니다.

[아발론]은 한마디로 팬보이용 영화입니다. '팬보이'라는 단어가 맘에 들지 않는다면 '오타쿠' 같은 단어를 쓰셔도 상관 없습니다. 중요한 건 이 영화가 노리고 있는 대상이 게임과 재페니메이션이라는 좁은 문화적 울타리 속에서 안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작품이라는 것이니까요. 이 영화의 가치관과 형이상학은 모두 이 사람들의 눈 높이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아마 제가 이 영화에 충분히 몰두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도 그 때문일 겁니다. 그들 부류에 속해 있지 않은 저 같은 사람들은 그들의 세계관이 도착적이라고 느끼며 이 영화의 주인공들이 공유하고 있는 무기류와 게임 용어에 대한 집착이 필요 이상으로 물신론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그러는 너는 어떠냐"하고 저에게 묻는다고 해도 특별한 대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요.)

물론 그런 물신론적 집착으로도 깊이 있는 작품을 추려낼 수도 있습니다만, [아발론]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종종 이 영화가 '난해하다'는 평을 읽었는데, [아발론]은 '난해한' 영화는 아닙니다. 관객들이 갈팡질팡하는 이유는, 영화가 특별히 복잡하고 심오한 이야기를 해서가 아니라, 영화가 게임과 배경 설정에 대한 정보를 능률적으로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용 자체는 쉽디 쉽습니다. 이 영화의 바탕이 되는 형이상학이야 사이버펑크물이 유행하기 훨씬 전에도 존재했던 것이니까요.

그런데도 영화는 이게 무언가 대단한 것인 것처럼 거창하게 이야기를 끌어가는데, 이 역시 최선의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대충 이 영화의 대사들을 떠올려보세요. 상대방과 상호 작용을 하는 문장들은 터무니없이 부족합니다. 다들 자기가 무슨 사이버펑크 시대의 파스칼이라도 되는 것처럼 서툰 경구들을 중얼거릴 뿐입니다. '아무개는 아무개인 법이다'식의 문장이 왜 이렇게 많은 건지요. 무게를 잡기 위해 아서왕의 전설과 같은 것들을 끌어들이는 수법은 너무나도 전형적인 팬보이 스타일이라 귀엽기까지 합니다.

캐릭터와 스토리도 비교적 약한 편입니다. 역시 내용보다는 쿨함에 지나치게 집중한 결과겠지요. 애쉬는 SF 버전 브리지트 그레고리처럼 담배를 물고 쿨하게 행동하지만 정작 자신의 내면은 거의 보여주지 않습니다. 캐릭터의 깊이를 부여하기 위해 삽입된 과거의 기억 역시 얇팍하기 짝이 없고요. 다른 인물들은 그 정도도 없습니다. 모두 아발론 게임의 캐릭터들처럼 소모품일뿐이에요. (흠... 이게 의도적이었을까요? 아뇨, 아닐 겁니다.) 스토리 역시 필요 이상으로 느리고 선이 가늘며 정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해주는 대신 끝도 없이 'Ain't it cool?'을 외쳐대는 듯 해요.

그러나 애니메이션과 실사의 어정쩡한 경계에 서 있는 이 영화의 비주얼은 인상적입니다. 현장 연출이 좀 뻣뻣하다는 느낌을 받긴 했지만, 이 흐릿한 회색빛으로 가득 찬 음울한 동구권 도시를 돌아다니는 기분은 이상할 정도로 만족스럽군요. 꽤 많은 첨단 특수 효과가 사용된 영화지만, 벽에 영사되는 '고스트'의 이미지와 같은 것처럼 소박한 특수 효과 역시 좋습니다.

이 시각적 스타일에 제대로 된 내용이 입혀졌다면 정말 좋았겠지만, [아발론]은 스타일의 과시로만 끝나고 맙니다. 어쩔 수 없는 팬보이용 영화의 한계일까요? (01/02/22)

DJUNA

기타등등

1. 마지막 레벨에 도착한 애쉬가 거리로 나가는 장면이 있죠. 그런데 복도까지만 해도 맨발이었던 애쉬가 거리로 나왔을 때는 검은 구두를 신고 있더군요.

2. 왜 멀쩡하게 L 발음을 표기할 수 있으면서도 [아바론]이라고 썼는지 알가다도 모를 일입니다. Thief를 '시프'로 표기한 건 또 무슨 이유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