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리처드 링클래터 Richard Linklater

주연
이든 호크....제시
Ethan Hawke....Jesse
줄리 델피....셀린
Julie Delpy....Celine
버논 돕트체프....서점 매니저
Vernon Dobtcheff....Book Store Manager
디아볼로....필립
Diabolo....Philippe

(스포일러가 있거든요?)

제시와 셀린

리처드 링클래터의 [비포 선라이즈]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신선하고 매력적인 영화였습니다. 무엇보다 재미있었던 건 영화의 정갈함이었죠. 두 매력적인 젊은이들이 낯선 도시에서 끊임없이 수다를 떤다는 설정만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는 영화의 시도는 관객들에게 거의 에릭 로메르적인 우아한 쾌락을 제공해주었습니다.

이 영화의 설정은 사실 속편을 용납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주인공들이 "6개월 뒤에 다시 만나!"를 외치며 헤어지는 장면으로 영화를 끝냈으면서 정말로 6개월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 말해주는 속편을 만든다면 그건 전편에서 쌓은 로맨티시즘을 고의로 망치는 것이죠.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6개월 뒤에 재회할지도 모르는 두 연인 이야기를 꼭 6개월 뒤에 시작할 필요도 없고 전편의 순진한 로맨티시즘을 꼭 지켜야 할 필요도 없는 겁니다.

[비포 선셋]은 6개월 뒤가 아닌 9년 뒤에 시작됩니다. 제시는 9년 전 자신과 셀린이 나누었던 경험을 토대로 자전적인 소설을 써서 유명해졌습니다. 파리의 '셰익스피어 앤 콤파니'에서 인터뷰를 하던 그는 몇 년 전부터 파리에 살면서 환경 운동가로 활동하던 셀린과 재회하게 되지요. 저녁 7시에 떠날 비행기를 기다리기 전까지 그들은 파리의 골목을 산책하며 9년 전처럼 수다를 떱니다.

이 설정 자체는 굉장히 작위적입니다. 이미 클로드 를르슈가 [남과 여]의 속편에서 시도했다가 완벽하게 말아먹은 적 있죠. 하지만 링클래터는 성공했습니다. 어쩌다가? 소재의 성격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쿨한 이미지 속에 낡은 멜로드라마를 숨겨놓고 있었던 [남과 여]와는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이지적인 대화들로만 이루어진 [비포 선라이즈]는 역시 같은 형식을 취한 속편의 적절한 대화 소재가 될 수 있었고 그건 이런 형식의 영화에서 너무나도 당연했던 거죠.

이들은 어떤 이야기를 할까요? 뭐, 여러가지 이야기를 한답니다. 환경문제, 국제 정세, 콘서트 경험, 과거의 연애담... 그러나 한가하게 사방으로 튀는 것 같던 그들의 대화는 중반 이후 서서히 로맨스라는 주제로 수렴됩니다. 그리고 이 주제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는 그들 자신이 9년 전에 겪었던 짧은 만남입니다.

여기서 [비포 선라이즈]는 [비포 선셋]이라는 영화에 흥미로운 깊이를 제공해줍니다. 네, 이들은 6개월 뒤에 비엔나에서 만나지 않았어요. 제시는 갔지만 셀린은 할머니의 장례식 때문에 가지 못했지요. 이제 각자의 삶을 살고 있는 그들은 그 때 둘이 재회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해합니다. 가볍게 안부를 묻는 식으로 시작되었던 두 사람의 대화는 단 한 번 있었던 결정적인 기회를 날려버린 것에 대한 씁쓸한 회한으로 가득 차게 되지요.

캐릭터들도 그 동안 자랐습니다. 낙천적이고 선량하기만 했던 전편의 캐릭터들은 그 동안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 생활에 뛰어들고 그렇게까지 행복하지 않은 사생활의 경험들을 거치면서 어른이 되었습니다. 둘 다 조금씩 더 말랐고 지쳤고 젊은 시절의 희망들을 상당히 잃었으며 더 냉소적이 되었습니다. 이들의 캐릭터 묘사는 전편보다 훨씬 더 현실적인데, 두 주연 배우가 각본에 훨씬 깊이 참여한 결과로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셀린의 뉴욕 생활, 제시의 결혼생활에 대한 이야기들은 두 배우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거든요. 그 때문인지 두 배우들은 마치 캐릭터 속에 녹아든 것처럼 자연스럽습니다.

굉장히 비영화적인 소재를 다룬 작품처럼 보이지만 [비포 선셋]은 놀랄만한 기술적 성취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실시간으로 진행됩니다. 영화 대부분이 걸어가거나 배나 차를 탄 두 사람들을 따라가는 긴 롱테이크로 구성되어 있고요. 게다가 이 모든 게 해가 질 무렵의 아슬아슬한 시간대를 잡은 로케이션 촬영입니다! 정말로 인상적인 건 이런 것들이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영화가 편안하고 아름답게 흐른다는 것입니다.

[비포 선셋]은 전편과 마찬가지로 깃털처럼 가볍고 귀여우며 선량한 영화입니다. 하지만 그 가벼운 풍미는 잘 익은 포도주처럼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성숙했고, 속편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논리는 거의 이상적이고, 인상적인 설정에도 불구하고 관습적 멜로드라마의 공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던 전편과는 달리 설정을 순수하고 완벽하게 즐기는 듯 하며, 정말로 잘 먹히는 인상적인 결말을 갖추고 있습니다. 네, 이 정도면 본편의 팬들도 충분히 안심할만하군요. (04/10/06)

DJUNA

기타등등

1. 셀린네 아파트 마당에서 열심히 고기를 굽는 아저씨는 줄리 델피의 아빠인 알베르 델피입니다.

2. 셀린과 제시가 9년 동안 만나지 않았다면 [웨이킹 라이프]에 나왔던 둘은 누구냐고 묻는 분들이 계시겠지만... 거기에 대해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맙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