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밀코 만체프스키 Milcho Manchevski

주연
캐트린 카트리지....앤
Katrin Cartlidge....Anne
라데 세르베지야....알렉산더
Rade Serbedzija....Aleksander
그레그와르 콜랭....키릴
Gregoire Colin....Kiril
라비나 미테프스카....자미라
Labina Mitevska....Zamira
제이 빌리어즈....닉
Jay Villiers....Nick

1.

[비포 더 레인]은 무척 쉬운 영화입니다. 만약에 감독이 시간을 꼬는 서커스를 하지 않았더라면 베니스 영화제의 심사위원 어르신들께서 과연 이 영화에 주목이나 했을까요?

각 에피소드의 내용도 독창적은 아니지요. 키릴과 자미라의 사랑은 수 천 년 동안 세계 곳곳에서 끊임없이 되풀이 되어 오는 이야기의 또다른 변형이고, 앤의 이야기 역시 이해하기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알렉산더의 선택에 대해서는... 종군사진작가에 대해 이야기를 만들라고 하면 누구나 가장 먼저 생각해내는 것이죠. 발칸 반도의 복잡한 역사를 모르더라도 영화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알바니아와 마케도니아 사람들이 서로를 증오하며 싸웁니다. 그 정도만 알면 충분합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인과관계가 이상하게 얽힌 시간의 서커스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복잡한 해석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혹시나 관객들이 어려워 할까봐 감독인 만체프스키는 지나칠 정도로 많은 설명들을 깔고 있습니다. 주인공들은 끊임없이 시간에 대해 언급하고 심지어 너무나 적절한 문구가 담벼락에 쓰여져 있기까지 합니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미묘한 상징이나 숨겨진 암호를 찾다가는 쉽게 오독으로 빠질 수 있습니다. 그만큼이나 평이합니다.

이 영화의 쉬움은 장점도 될 수 있지만 단점도 될 수 있습니다. 우선 [비포 더 레인]은 거들먹거리는 영화가 아닙니다. 이 영화를 보고 이해했다고 으쓱거릴 관객들은 아마 별로 없을 겁니다. 그리고 진부하고 간단한 이야기들일지는 몰라도 원래 그런 이야기들이 효과적인 법이지요. 하지만 그 평이함은 영화 자체를 빈약하게 만들 가능성 역시 가지고 있습니다.

2.

이 영화에서 가장 재미있는 형식적인 면은 바로 시간입니다. 세 이야기의 시간 구조는 서로 이상하게 얽혀있습니다. 재배치하면 단선적인 구조가 완성되는 [펄프 픽션]과는 달리 이 영화의 시간은 과거와 미래가 얽혀서 이상한 꼬임을 만들어냅니다. 얼핏 보기에는 2-3-1의 구조지만,'2. 얼굴들'의 에피소드에서 '1. 말들'의 에피소드의 여파(자밀라와 키릴의 사진,그리고 아마도 키릴이 건 듯한 전화)가 보여지므로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저 무성의하게 뒤섞인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하나의 법칙이 있습니다. 각 에피소드는 앞 에피소드를 과거로 해서 밟고 올라갑니다. 1의 경우는 3을 과거로 삼지요. 이런 식으로 해서 끊임없이 다람쥐 쳇바퀴처럼 돌아갑니다.

니체의 무한회귀를 연상시키지 않습니까? 확실히 만체프스키는 그와 같은 면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영화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살육과 학살의 역사를 숙명처럼 묘사하는 데에 이러한 장치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시간이 쳇바퀴처럼 끊임없이 돌기만 하지는 않습니다. 영화는 나름대로 비상구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더의 선택은 다소 개인적이고 관객들에게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하게 영화의 순환을 끊어놓습니다. 이 영화는 직선적인 구조의 영화입니다. 사건의 순서만을 쫓아가지 않고 그 극적인 논리를 따라가면 그 점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제목까지도 그걸 암시하고 있지요. 이 영화는 '비오기 전'의 이야기입니다. 영화가 시작할 때와 끝의 상황은 분명히 달라져 있습니다.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형식이 너무나 재미있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관객은 영화 속에서 일어나는 살육과 증오의 드라마를 소홀히 하고 형식에 더 집착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영화의 내용이 필요 이상으로 가벼워지게 됩니다.

3.

[비포 더 레인]은 간결하고 세련된 영화입니다. 지나치게 무리가 없다는 생각까지 들며 '영화제용'이라는 의심은 끝까지 지울 수 없습니다. 영화 미개국의 거칠고 격렬한 영화를 기대하고 보신 분들은 당연히 실망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기대 자체가 무의식적으로 우리가 받아들이고 있는 서구우월주의에서 비롯된 편견일지도 모르지요. 감독이 뮤직 비디오 연출자 출신이라고요... 흠...

저희들의 개인적 의견으로는 1부가 가장 좋았고, 2부는 의도야 어떻게 되었든 전체 내용과 약간 떨어져 보였으며, 3부는 조금 산만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지만 풍경화를 보듯 멀리 떨어져서 본다면 사실 큰 무리는 없습니다. 형식에 주제가 묻힐 수도 있다고 앞에서 썼지만, 각 에피소드들은 나름대로 효율적으로 관객들의 감정을 자극합니다. 관객이 지독한 지적 스노브가 아니라면 이 영화에 대해 철저하게 냉소적이지는 않을 겁니다.

아나스타샤의 음악은 이 영화의 가장 뛰어난 부분 중 하나입니다. 배우들도 튀지 않고 적절하게 자기 위치를 소화해냈다고 봅니다. (95/06/16)

D&P

기타등등

소위 '예술 영화(근데 이게 과연 뭘까요?)'라는 것에 겁을 먹고 있는 사람들에게 한 번 쯤 권할 영화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의 자신감을 세워 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