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Bernardo Bertolucci

주연
탠디 뉴튼....샨두라이
Thandie Newton....Shandurai
데이빗 튤리스....킨스키 씨
David Thewlis....Mr. Kinsky
클라우디오 산타마리아....아고스티노
Claudio Santamaria....Agostino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듀나 베르톨루치의 [하나의 선택]은 무척 진부한 러브 스토리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반세기 전 할리우드에서 [카사블랑카]가 했던 것과 거의 같은 내용이죠. 망명객인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가 여자의 남편을 구하기 위해 작은 희생을 한다는 것이니까요.

파프리카 진부하기보다는 보편적인 이야기겠지요. 이야기 자체가 너무 당연하기 때문에 여기서 줄거리의 독창성을 트집잡는 것은 억지처럼 느껴집니다.

듀나 저 역시 뻔한 줄거리에 매달릴 생각은 없답니다. 그건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니까요. 베르톨루치는 아주 작은 이야기를 가볍고 작게 다루려고 한 것 같으며 이런 이야기는 그런 작은 영화에 어울립니다.

파프리카 위에 요약된 이야기가 바로 이 영화의 줄거리지만 [카사블랑카]와 차별화하기 위해서라도 한 번 더 상세하게 이야기해야 할 것 같군요. 이 영화의 주인공은 아프리카의 모 나라에서 망명한 의대생 샨두라이입니다. 샨두라이는 영국인 피아니스트 킨스키의 집 지하실에서 살면서 가정부로 일하고 있죠. 킨스키는 샨두라이에게 청혼을 하지만 샨두라이에겐 정치범으로 투옥된 남편이 있었어요. 킨스키는 샨두라이를 돕기로 결심하고 그의 수줍은 방식으로 행동에 옮깁니다.

참 작고 조용한 영화입니다. 이름이 붙은 캐릭터는 셋 정도밖에 없습니다. 샨두라이, 킨스키 그리고 샨두라이의 게이 친구인 아고스티노. 대사도 별로 없죠. 샨드라이와 킨스키의 미묘한 관계는 거의 대사 없이 표현됩니다. 종종 영화는 아무런 대사 없이 음악과 배우들의 표정 연기만으로 몇 십분씩 끌고 갑니다. 이 때문에 영화는 종종 무성영화적인 순수성에 도달하지요.

베르톨루치는 스토리보다는 이들의 은밀한 감정 교류를 섬세하게 표현하는 데 더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섹스신이 하나밖에 없는 영화지만 [하나의 선택]은 무척 관능적인 작품입니다. 음악은 물론 아주 중요한 유혹의 도구입니다. 샨두라이와 킨스키의 사사로운 행동들은 모두 섹스없는 긴 전희처럼 보입니다. 게다가 카메라는 샨두라이 역 배우 탠디 뉴튼과 거의 육체적인 섹스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때는 카메라의 이 은밀한 더듬거림이 지나쳐서 음탕해보이기까지 해요.

듀나 영화는 샨두라이를 아주 육체적인 존재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최근 연애 영화에 나온 여자 주인공들 중 그녀만큼이나 살덩어리인 육체와 밀접하게 결부된 인물은 없습니다. 특히 샨두라이는 신체의 모든 분비물을 영화 속에서 다 쏟아내는 것 같아요.

여성 캐릭터에게 살아 숨쉬는 육체를 부여한 것 자체를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아무래도 의도가 미심쩍습니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백인 남성 감독이 흑인 여성의 스테레오 타입화된 이미지를 욕구 충족을 위해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어요.

더 불편한 것은 이 이야기를 단순한 러브 스토리로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고 싶어도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주종관계들이 모조리 튀어나와 한치도 어긋남이 없이 샨두라이와 킨스키의 관계에 끼어드니까요. 남성/여성, 백인/흑인, 집주인/하녀, 유럽인/아프리카인... 저처럼 정치에 관심없는 사람도 보면서 불편할 지경입니다.

파프리카 샨두라이와 킨스키는 그렇게까지 종속적인 관계는 아닙니다. 킨스키가 샨두라이에게 자신의 특권을 내세운 적도 없고요. 그가 종종 삐딱하게 구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건 그가 수줍은 사람이기 때문이죠.

듀나 캐릭터들에게 잘못을 돌릴 수는 없겠지요. 하긴 기둥 줄거리만 따진다면 트집 잡을 구석은 별로 없습니다. 만약 이 영화가 타인종간의 러브 스토리가 아니었다면 저도 신경을 덜 썼을 거예요.

하지만 그렇게까지 만만하지는 않습니다. 영화는 보통 자기가 하려는 이야기 이상을 하기 마련이니까요. 영화가 아무리 순수한 척 굴어도 이미 관객들이 쌓아놓은 선입견 속에서 깨끗하게 남을 수는 없습니다. 그게 문제인 것이죠. 둘은 어떻게든 상호작용을 하기 마련입니다.

게다가 과연 이 이야기가 그렇게까지 깨끗한 것이긴 한지? 심지어 국적도 제대로 언급되지 않은 채 '아프리카'라는 막연한 이름으로 표현되는 곳에 대해 이 영화가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있기는 한 것인지? 똑똑한 의대생인 샨두라이가 왜 킨스키한테 그렇게까지 종속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건지? 이들 사랑의 절정이어야 할 섹스 신이 거의 매춘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지? 게다가 마지막 장면은...

파프리카 마지막 장면에 대해서는 말들이 많더군요. 하지만 전 영화가 그랬던 것처럼 그냥 열어놓은 채 두는 편이 나았다고 생각합니다.

듀나 하지만 그게 완전히 열린 결말처럼 보이지 않는 건 무슨 이유일까요? 그건 이 영화가 사랑과 의무에 대한 영화보다는 백인 남자와 흑인 남자 사이에 끼인 흑인 여자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전 이 영화를 그냥 의무와 헌신에 대한 순수한 러브 스토리로 보고 싶습니다. 영화가 선사해주는 감각적 아름다움과 관능성, 그리고 좋은 두 배우를 생각하면요. 그러나 그러기가 쉽지 않아요.

파프리카 탠디 뉴튼은 슬슬 자리를 잡고 있는 것 같죠? 요새 굵직굵직한 영화의 주연을 연달아 맡고 있잖아요. 경력을 생각해보면 때늦은 감이 있습니다만.

듀나 전 뉴튼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편입니다. 그 사람이 우간다 교환 학생으로 나왔던 [플러팅] 때 이미지가 워낙 좋았거든요. 이 영화에서도 좋은 연기를 보여주지만 역시 [플러팅] 때가 더 좋았어요. 캐릭터가 더 마음에 들어서겠지요.

파프리카 데이빗 튤리스 역시 아주 좋은 캐스팅입니다. 그 사람 특유의 어정쩡한 수줍음과 조용한 위악이 킨스키라는 캐릭터에 아주 잘 어울려요. 게다가 그의 허옇고 비리비리한 외모가 뉴튼의 건강한 갈색 이미지와 충돌하는 걸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군요.

슬슬 마무리지을 때가 되었네요. 어떻게 결론내리겠어요? 잘 만들었지만 불편한 영화?

듀나 아마 그래야겠지요. 베르톨루치가 쓸데 없는 욕심을 부리지 않았거나 대상에 대해 조금 더 신경을 썼더라면 훨씬 맘 편하게 볼 수 있는 영화가 되었을텐데. (00/04/26)

D&P

기타등등

웃기는 건 베르톨루치가 아프리카식 땀냄새나는 육체적 현존을 구현하기 위해 고용한 배우가 실생활에서는 왕족 출신에 야무진 상류층 악센트를 구사하는 영국 여성이였다는 것이죠. 역시 실제 세계는 선입견을 끊임없이 배신하는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