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폴 버호벤 Paul Verhoeven

주연
카리스 판 하우텐....라헬/엘리스
Carice van Houten....Rachel/Ellis
세바스티안 코흐....루드비히 뮌츠
Sebastian Koch....Ludwig Müntze
톰 호프만....한스 아커르만스
Thom Hoffman....Hans Akkermans
할리나 레인....로니
Halina Reijn...Ronnie
발데마르 코부스....귄터 프랑켄
Waldemar Kobus....Günther Franken
데렉 드 린트....헤르벤 쿠이퍼스
Derek de Lint....Gerben Kuipers

라헬

제2차 세계대전이 지금 다시 영화 소재로 각광을 받고 있는 건, 비교적 명확한 선악구분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나찌는 강제수용소와 가스실을 운영한 학살자들이고 연합군과 레지스탕스는 이들에 대항하는 선인이라는 대립 구조는 지금처럼 우리가 하는 행동에 대한 확신이 없는 시기엔 여러 모로 유혹적이죠. 가끔 관대해져서 추축국측 군인들을 파시스트 국가의 희생자인 개인으로 묘사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기본 구조는 쉽게 허물어지지 않습니다.

폴 버호벤(오래간만에 찍은 네덜란드 영화이니 페르호번이라고 불러야 할까요?)의 [블랙북]이 재미있는 건 이 영화의 악역이 사악한 파시스트 제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영화에서도 나찌는 악역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제2차 세계대전 영화식 악역은 아니죠. 이 영화의 악역들은 모두 일차적으로 자신의 죄에 책임이 있습니다. 나찌가 그들을 악당으로 만든 건 아니죠.

영화의 각본은 버호벤이 [오렌지의 병사들]을 만들기 위해 수집한 실화들을 바탕으로 쓰여졌습니다. 물론 '실화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이 이야기들이 모두 실화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심지어 영화 각본이 쓰여지는 동안에는 주인공의 성별도 정해지지 않았다고 하거든요. 물론 이 이야기의 핵심이 되는 일화들과 비슷한 사건들은 실제로 일어났겠지만요.

영화의 주인공은 라헬 슈타인이라는 유태인 가수입니다. 독일군 침공 이후 은신처에 숨어 지내던 라헬은 가족이 모두 독일군에게 살해당하자 네덜란드 레지스탕스에 가담합니다. 엘리스 드 브리스라는 이름으로 새 신분증을 얻고 머리도 금발로 염색한 라헬은 우연히 만난 루드비히 뮌츠라는 독일군 장교의 비서로 들어가 스파이 활동을 시작해요. 하지만 처음엔 그럭저럭 풀리는 것 같던 스파이 활동은 곧 최악의 상황으로 빠져 버립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 영화는 '나찌=악당'이라는 단순한 공식을 따르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 영화의 가장 노골적인 악당인 귄터 프랑켄은 모범적인 나찌이기 때문에 나쁜 건 아닙니다.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유태인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돈과 보석을 빼돌리는 범죄자이기 때문에 나쁜 거죠. 그는 독일군의 입장에서 봐도 군사재판감입니다.

영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 악당들의 리스트는 더 길어지고 넓어집니다. 영화가 추적하는 진짜 악당들은 제2차 세계대전의 혼돈을 노려 사리사욕을 챙기는 네덜란드인 배반자들이거든요. '평범한 네덜란드인'들 역시 그렇게 좋게는 묘사되지 않습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혐오스럽고 역겨운 폭력을 가하는 이들은 독일군 협조자들을 무자비하게 린치하는 평범한 네덜란드인들이지요. 심지어 영화는 유태인=희생자라는 모범적인 구도도 살짝 비틀고 있습니다. 영화 도입부와 결말에 보여지는 50년대 키부츠의 묘사는 생존자들이 벌이는 결백한 삶의 예찬과는 거리가 멀거든요. [블랙북]은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독일군과 싸운 레지스탕스 투사들을 예찬하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결코 당시 상황이 흑백으로 나눌 수 있을만큼 단순하지 않았고 그 이유는 인간이라는 동물의 원초적인 한계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주제를 떠나 본다면, [블랙북]는 장르물입니다. 그것도 아주 충실한 장르물이죠. 음모와 배신으로 점철된 플롯은 너무나도 멀끔하게 짜여져 있어서 실화의 생생한 느낌이 죽을 지경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 투박하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하지만 재미있습니다. 주인공은 매력적이고 액션은 잘 짜여졌으며 속도도 빠르죠. 라헬을 연기한 카리스 판 하우텐([미노스]의 말하는 고양이 아가씨!)과 양심적인 독일 장교 뮌츠를 연기한 세바스티안 코흐([타인의 삶]의 우울한 작가 양반)의 화학반응도 좋아서 로맨스도 잘 살아 있습니다.

여전히 자잘한 결함은 있지만, [블랙북]은 폴 버호벤이 오래간만에 만든 수작입니다. 역시 고국이 좋은 걸까요?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것까지야. 할리우드에서 얻은 명성 때문에 버호벤이 네덜란드 영화계에서 휘두를 수 있었던 권력도 만만치 않을 걸요. (07/03/12)

DJUNA

기타등등

판 하우텐과 코흐는 요새 사귄다고 하더라고요. 뻔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