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스티븐 노링턴 Stephen Norrington

주연
웨슬리 스나입스....블레이드
Wesley Snipes....Blade
스티븐 도프....디콘 프로스트
Stephen Dorff....Deacon Frost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에이브러햄 위슬러
Kris Kristofferson....Abraham Whistler
엔부쉬 라이트....카렌
N'Bushe Wright....Karen
우도 키에르....드라고네티
Udo Kier....Dragonetti

1.

흡혈귀 물을 만드는 사람들은 일단 선택을 해야 합니다. 유니버설 호러 영화 배우들의 이름을 끌어들여 유식한 척을 하면서 말해보라면 벨라 르고시 식 흡혈귀냐 글로리아 홀든 식 흡혈귀냐를 선택해야 한단 말이죠. 르고시 식 흡혈귀는 죽어 마땅한 괴물이니 이 경우 주인공은 흡혈귀 사냥꾼이 되고, 홀든 식 흡혈귀는 보다 복잡 미묘하고 동정가는 요소가 많은 흡혈귀니 이 경우는 흡혈귀 쪽에 보다 무게가 실리게 됩니다. 물론 순수하게 어느 쪽 길만을 선택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만들다보면 한쪽으로 기울어지게 됩니다.

이런 선택은 영화의 내용을 결정짓습니다. 르고시 식으로 나간다면 [드라큘라의 공포]와 같은 단순한 선악구조의 영화가 되고 홀든 식으로 간다면 [어둠의 딸들]이나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와 같은 조금 복잡한 이야기가 되니까요.

2.

[블레이드]는 전자를 택하고 있는데, 이 영화(원작 만화가 어땠는지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가 단순한 선악구조의 액션물을 지향하고 있으므로 그 선택은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블레이드]가 노리는 것은 폭력적인 주인공들이 악당들을 지나칠 정도로 심하게 때려부수는 것을 보여주면서 관객들을 자극시키려는 것입니다. 악당들을 흡혈귀로 만들면 학살의 정당성이 강화되므로 폭력의 수준을 더 높일 수 있죠.

문제는 제가 그네들에게 충분히 공감할 수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아무리 머리를 단순하게 만들고 보려고 해도 저한테 학살은 그냥 학살입니다. 특히 도입부에서 블레이드가 클럽에서 흡혈귀들을 죽이는 장면은 아주 불쾌했어요. 조금 더 정치적이 되고 싶은 분들은 여기에 꼬리를 잔뜩 달 수도 있을 겁니다. 전 하기 싫습니다만.

하여간 지나치게 멋부린 폭력과 과장된 남성성의 남발은 매우 불쾌하고 또 흥미도 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흡혈귀들이 불쌍해 보이더군요.

3.

블레이드는 인간 반 흡혈귀 반인 흡혈귀 사냥꾼인데, 별로 대단한 설정은 아닙니다. 상당히 진부하다고 할 수 있죠. 일종의 절충주의적인 선택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흡혈귀의 여러 요소들에 매료됩니다. 영원한 젊음이나 미모(이건 꼭 따라주는 게 아니지만 그래도 영화 속의 주인공 흡혈귀들은 다 선남선녀잖아요?) 특출한 능력 기타 등등 기타 등등이죠. 햇빛을 볼 수 없다거나 하는 부정적인 요소들도 일종의 '쿨'한 매력으로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흡혈귀는 사람 피를 빨아마시는 괴물이므로 마음을 팍 열어놓고 좋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안이한 정신의 작가들이 절충적인 착한 흡혈귀들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뱀피렐라나 블레이드 같은 친구들이 그 산물이죠.

대부분 그 결과는 좋지 않습니다. 긍정적인 수퍼 히어로 흡혈귀는 흡혈귀라는 설정의 어두운 면을 완전히 망각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어두운 면이 흡혈귀라는 설정의 진짜 매력이거든요.

블레이드에게도 어두운 면이 있다고요? 설정만 그렇죠. 인간과 흡혈귀의 사이에 낀 편집증적 영웅이라... 말만 좋습니다. 화면 속에 나오는 주인공은 흡혈귀 때려잡는 것 이외엔 아무 생각없는 단순한 살상기계입니다. 설정은 가끔 복잡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주지만 단순무식한 캐릭터가 그걸 무시해버리는 거죠.

대표적인 예로 블레이드가 자기 엄마를 죽이는 장면을 들 수 있습니다. '패륜아'라고 욕하려는 게 아니에요.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죠. 하지만 남들이라면 영화 두 편을 찍었을 이 복잡미묘한 상황과 마주쳐도 블레이드는 눈썹 하나 깜빡하지 않으니 바로 그게 문제인 것입니다(한 번쯤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놈의 선글래스가 가려버렸으니 어디 보이기나 합니까.) 따라서 이런 고함이 저절로 나오는 거예요. "이 재미없는 녀석아!"

단순한 게 죄냐고요? 그건 아닙니다. 그러나 단순한 캐릭터에게 불필요하게 복잡한 설정을 주어서는 안되죠. 그게 그냥 멋부리기 위해서라면 특히 더 그렇고.

4.

아마 이 영화는 웨슬리 스나입스가 가장 멋없게 나온 영화 중 하나일 겁니다. 스나입스와 같이 강건한 체격의 배우는 단순히 강인한 터프 가이 역을 하면 재미가 없어집니다. 너무 단순해지는 거죠. 이 영화에서 스나입스는 너무 매력이 없어서 보기가 짜증날 지경입니다.

프로스트 역의 스티븐 도프 쪽이 더 낫습니다. 도프의 경우, 그의 상대적으로 왜소한 체격이 오히려 그의 카리스마를 강화시킵니다. 블레이드와 프로스트의 최후의 결투 장면도 도프 쪽이 더 인상적입니다. 스턴트 더블이 더 좋아서가 아니라, 블레이드 쪽이 훨씬 체격이 크니까 그 큰 상대와 싸우는 작은 쪽이 더 인상적으로 보이는 거죠. 옆의 사진을 보세요. 오히려 스나입스 쪽이 이류 악당이고 도프가 주인공인 것 같아 보이지 않나요?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은 그냥 심심하고 카렌 역의 엔부쉬 라이트는 존재감도 없군요. 지루해요. 오히려 잠시 나오는 우도 키에르가 그 미약한 비중에도 불구하고 더 인상적입니다.

(참, 소프트 포르노 팬이 있다면 도입부를 잘 보시길. 트레이시 로즈가 흡혈귀로 잠시 나옵니다.)

5.

컴퓨터 그래픽이 많이 쓰였는데, 대부분은 흡혈귀가 죽어나가는 장면에 사용됩니다. 잘 만든 건 아니군요. 컴퓨터 티가 지나치게 많이 나요. 돈이 부족했나보죠. (98/12/09)

DJUNA

기타등등

자막 때문에 왼쪽으로 꽤 밀렸으면서도 양쪽이 다 잘리고 게다가 초점까지 안 맞는 화면을 보면서 왜 내가 지금까지 서울 극장을 폭파하지 않고 있는지 의심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게을러서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