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윤종찬

주연
장진영....박경원
김주혁....한지혁
한지민....이정희
김태현....강세기
유민....기베 마사코
Yuko Fueki....Masako Kibe
나카무라 토오루....도쿠다
Tôru Nakamura....Tokuda
나카하라 타케오....외무성 장관
Takeo Nakahara....Foreign Minister

1.

박경원

[청연]의 주인공 박경원은 실존인물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그리는 박경원의 삶은 반쯤 허구지요. 문제는 그 경계선이 어디냐는 것입니다. 전 이 영화의 남자주인공 한지혁이 거의 허구의 인물이라는 건 압니다 (이정희의 실제 수양오빠가 모델이 되어 주었다더군요.) 하지만 이 영화에 추가된 자잘한 픽션들이 박경원의 삶을 어느 정도 왜곡하거나 변형시키고 있는지 모릅니다. 아마 정확한 답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만큼 이 사람에 대한 의견과 추측과 추정이 많으니까요.

최근 인터넷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건 이 인물의 친일논쟁인데, 솔직히 조금 핀트가 어긋난 부분이 있습니다. 영화는 박경원이 협력자라는 사실을 부인하지도 않고 이 사람을 민족투사로 만드는 짓 따위도 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영화는 민족주의적인 입장에서 보았을 때 결코 결백하다고 할 수 없는 행동의 동기를 추정하고 그 상황을 이해하며 그에 따른 필연적인 비극까지 담아냅니다. 물론 그 추정이 드라마의 논리에 바탕을 둔 허구라는 건 어쩔 수 없는 한계일 수밖에 없지만요.

2.

[청연]은 데이빗 린이 즐겨 만들었던 호사스러운 대작과 여러모로 비슷합니다. 심지어 주인공도 닮았지요. [콰이강의 다리]의 니콜슨 대령이나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T.E. 로렌스처럼, 이 영화의 박경원도 어긋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어긋난 행동을 하는 모호한 캐릭터입니다. 단순하지만 모호하죠. 둘은 모순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논리는 비교적 단순합니다. 이 영화의 박경원은 정말 미친 것처럼 하늘을 날고 싶습니다. 이 사람의 머릿속엔 비행기와 하늘밖에 들어 있지 않아요. 문제는 그 순수한 열망을 살리기엔 살고 있는 세상이 너무 복잡한 것이죠. [청연]은 단순하고 열정적인 사람이 내린 회색 선택에 대한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박경원은 자신이 여자라는, 또는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는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 차별을 이겨낼 사람입니다. 하지만 하늘을 난다는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뭔가 걸리는 행동을 할 수밖에 없다면 결국 해버리는 사람입니다.

저에겐 꽤 설득력 있는 묘사입니다.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이야기고요. 그게 사실이냐는 다른 문제이고 그걸 정당화 해야 하느냐는 또 다른 문제지만요. 저보고 말하라면, 주인공을 이해하고 영화를 보기 위해 꼭 그 사람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겠습니다. [콰이 강의 다리]를 보면서 꼭 니콜슨 대령을 편들어야 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데이빗 린의 영화들이 그런 것처럼, [청연]도 그랜드 로맨스입니다. 단지 영화는 그 스케일을 불필요하게 과장하지는 않습니다. 이 영화에서 로맨스의 대상이 되는 인물은 한지혁이라는 기상장교인데, 전 괜찮은 설정인 것 같습니다. 매국노 아버지의 원죄를 짊어지고 사는 숫기 없고 의지 부족한 한국 지식인요. 결코 이상적인 연인이나 주인공은 아니지만 충분히 설득력 있는 캐릭터지요. 비교적 어긋나는 성격을 가진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호감을 느끼는 과정도 잘 묘사된 편이고요.

문제가 없는 건 아닙니다. 이 영화는 린의 영화들처럼 종종 지나치게 풍광 좋은 곳들만 골라 찾아다니며 '그림'을 만들려는 강박증에 희생이 됩니다. 아무리 그럴싸하게 보여도 한지혁이 가공의 인물이라는 사실은 영화의 몰입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3.

[청연]의 장점 중 하나는 이 영화가 정말로 대작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최근 나온 '대작들'을 보면서 "돈이 도대체 어디로 들어간 거야?"란 혼잣말을 한 게 하도 여러 번이라 이 영화의 때깔엔 일단 안도의 한숨이 나옵니다.

영화는 스펙터클을 내세운 옛 할리우드 대작들이 할 만한 거의 모든 일들을 합니다. 과거를 근사하게 재현한 세트들을 만들었고 역시 상당한 수준으로 완성해낸 비행 장면들도 삽입했죠. 배우들의 살짝 과장되고 양식화된 연기 스타일 역시 감독의 주문에 따른 것 같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윤종찬 감독은 옛날 할리우드 영화 감독이 되고 싶었나 봐요. 하긴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을 택한 사람들 중 그런 꿈을 한 번도 꾸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4.

[청연]은 좋은 멜로드라마입니다.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와 주제를 품고 있고 전체적인 완성도도 높습니다.

하지만 전 이렇게 생각해봅니다. 이렇게 허구의 멜로드라마를 첨가하는 대신 박경원이라는 실존인물의 삶에 직설적으로 접근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당시의 역사와 개인에 대해 더 정확하고 정직하며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하는 영화가 나오지 않았을까.

상상이야 할 수 있지만, 아마 어려웠을 겁니다. 그게 대자본 영화의 한계죠. 모험의 가능성이 부족한 겁니다. (05/12/22)

DJUNA

기타등등

이 영화에서 가장 실망스러운 부분은 미하엘 슈타우다허의 음악입니다. 거의 모든 음악들이 말러, 베토벤, 그리크, 클라우스 바델트가 작곡한 기존 음악의 재활용인데, 이런 절충주의적인 태도는 쉽게 성공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죠. 말러의 아다지에토는 멋진 곡이지만, 이 곡이 영화 음악으로 끝도 없이 나온다는 건 음악 감독이 게으르다는 증거 이상은 아닙니다.

(음악에 대해 당시 영화에 참여하셨다는 어떤 분이 메일을 보내주셨습니다. 자세한 내용을 보시려면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