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에릭 로메르 Eric Rohmer

주연
엠마누엘 숄레....블랑쉬
Emmanuelle Chaulet....Blanche
소피 르느와르....레아
Sophie Renoir....Lea
에릭 빌라르....파비앙
Eric Viellard....Fabien
프랑스와-에릭 강드롱....알렉상드르
François-Eric Gendron....Alexandre
안느-로르 뫼리....아드리안느
Anne-Laure Meury....Adrienne

파비앙과 블랑쉬

[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는 에릭 로메르의 [희극과 격언]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내 친구의 친구들은 모두 내 친구들이다'라는 격언이 사용되고 있죠.

제목과 사용된 격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의 줄거리는 한마디로 '친구의 애인을 사랑했네'입니다. 조금 더 길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아요. 파리 근방 소도시의 시청에서 일하는 블랑쉬는 식당에서 컴퓨터 학원에 다니는 레아를 만나 친구가 됩니다. 레아는 애인이 없는 블랑쉬를 남자친구 파비앙의 친구인 알렉상드르와 엮어주려 하죠. 하지만 레아가 잠시 휴가를 떠난 사이, 블랑쉬는 파비앙과 사랑에 빠집니다. 그러는 동안 레아는 알렉상드르에게 은근히 끌리는 자신을 발견하고요.

[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는 '로맨틱 코미디'입니다. 아, 에릭 로메르는 이전에도 연애와 관련된 코미디를 꽤 많이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영화들 중에서 [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만큼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을 철저하게 따르는 영화는 많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정말 일본식 '트렌디 드라마'에 이식해도 그대로 통할만하지 않나요?

뭐, 그렇다고 로메르가 의도적으로 젊은 관객들을 의식한 로맨틱 코미디를 시도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겠죠. 로메르의 영화들에 문학적인 느낌이 많이 나는 이유는 그가 자주 기존 문학의 공식을 그대로 끌어와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도 마찬가지죠. 단지 이 공식이 꽤 명이 길어 현대 로맨틱 코미디에서도 꽤 자주 사용된다는 것이 다를뿐입니다. 네 주인공들의 성격이 기존 로메르 영화 주인공들보다 트렌디 드라마의 주인공들 쪽에 가까운 것도 이유라면 이유일 텐데, 역시 특별히 이상할 건 없습니다. 아무리 로메르 영화 주인공들이라고 해도 자기 시대와 완전히 격리되어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나 [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는 전통적인 로맨틱 코미디는 아닙니다. 로맨틱 코미디에서 기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주인공들의 감정입니다. 하지만 [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에서 '사랑'은 줄거리를 끌어내는 도구일 뿐 핵심은 아닙니다. 그러기엔 그들의 감정이 너무 피상적이죠. 블랑쉬와 레아는 좋은 사이지만 정말로 깊은 우정을 나누는 친구들은 아닙니다. 사귄지도 얼마되지 않았고요. 알렉상드르에 대한 레아의 감정도 그저 같이 놀기 좋은 편이라는 정도죠. 그나마 깊이 다루어지는 블랑쉬와 파비앙의 관계도 [로미오와 줄리엣]식의 거창한 사랑과는 거리가 멉니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이들이 연애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이 애인들과 친구들로 구성된 세계에서 부딪히는 윤리적 딜레마에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더 중요하죠. 이들의 애정이 비교적 피상적이기 때문에 그들 앞에 놓여 있는 윤리적 규칙이 더 중요시되는 겁니다. 물론 음악 하나 쓰지 않고, 건조하고 차분하게 진행되는 로메르의 화법도 한 몫 합니다만.

로메르는 '친구'와 '애인'이라는 단어를 소유격으로 연결하는 걸 은근히 즐기는 것 같습니다. 파비앙은 블랑쉬를 좋아하지만 블랑쉬는 애인인 레아의 친구입니다. 블랑쉬는 파비앙을 좋아하지만 그는 친구인 레아의 애인이고요. 알렉상드르는 레아에게 끌리지만 레아는 친구 파비앙의 애인입니다. 레아는 알렉상드르에게 끌리는 편이지만 그는 애인 파비앙의 친구이고 친구 블랑쉬의 미래 애인으로 자기가 점찍어둔 사람입니다. 이것만으로도 모자란지, 그는 그들을 끝도 없이 친구들과 친구들로 연결된 다양한 상황에 집어던집니다.

여기에 뭔가 보편적인 해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 로메르도 그런 걸 제시할 생각 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로메르는 언제나처럼 모럴 딜레마를 끄집어내 놓고 거기에 대해 고찰하는 걸 즐깁니다. [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가 어쩔 수 없는 로메르식 말잔치 영화가 된 것도 당연해요.

[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는 에릭 로메르의 가장 효율적인 견본품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영화가 로메르 세계의 핵심을 찌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작품 중 가장 쉽고 대중적인 의미로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 영화의 순진한 단순함 때문에 로메르 세계의 매력이 특별히 줄어든 것도 아니니까요. (02/03/24)

DJUNA

기타등등

아마 제가 극장에서 본 유일한 로메르 영화일 겁니다. (네, 전에 했던 로메르 영화제는 놓쳤어요.) 과천 미술관에서 했던 모 영화제의 상영작이었던 것으로 기억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