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킴벌리 피어스 Kimberly Peirce

주연
힐러리 스웽크....티나 브랜든/브랜든 티나
Hilary Swank....Teena Brandon/Brandon Teena
클로에 세비니....라나
Chloë Sevigny....Lana
피터 사스가드....존
Peter Sarsgaard....John
브렌든 섹스턴 3세....톰
Brendan Sexton III....Tom
앨리슨 폴란드....케이트
Alison Folland....Kate
알리시아 고란슨....캔디스
Alicia Goranson....Candace
매트 맥그라드....로니
Matt McGrath....Lonny
롭 캠벨....브라이언
Rob Campbell....Brian
지네타 아네트....라나의 엄마
Jeanetta Arnette....Lana's Mom

1.

1993년 12월 30일, 네브라스카에 있는 폴즈 시티라는 작은 소도시에서 끔찍한 살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살인범은 존 로터와 톰 니센이라는 동네 청년들이었고, 살해된 사람들은 21살의 브랜든 티나와 그의 두 친구 리자 램버트와 필립 디바인이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끔찍한 사건이었지만, 이 살인사건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이유는 다른 데 있었습니다. 살해당한 브랜든 티나는 원래 티나 브랜든이라는 이름의 여자였거든요.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브랜든 티나의 놀라운 삶이 밝혀지기 시작했습니다. 브랜든 티나가 어떻게 폴즈 시티 사람들을 완벽하게 속여넘겼는지, 어떻게 브랜든 티나가 그의 여자 친구들을 매료시켰는지... 물론 브랜든의 애인들 중 가장 유명해진 사람은 살인범인 존 로터의 여자친구였다가 나중에 브랜든의 마지막 애인이 되었던 라나 티스델이었어요.

여기까지는 괜찮았습니다. 전 신문 해외 뉴스 란에 실린 기사로 브랜든 티나에 대해 알게 되었지만, 그 즉시 잽싸게 잊어버렸으니까요. 저한테 이건 일종의 자기 방어적인 기술입니다. 전 이런 끔찍한 이야기엔 무척 민감한 편이어서 정신 건강을 위해 일단 잊어버리는 쪽을 택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상한 소문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할리웃 사람들이 슬슬 브랜든 티나의 이야기에 관심을 쏟는다는 것이었어요. 수많은 계획안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중 가장 가능성이 높았던 계획은 드루 배리모어에게 브랜든 티나 역을 맡긴다는 것이었습니다. 슬슬 겁이 나기 시작했죠. 전 이 전직 아역 배우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편이기 때문에, 만약 영화가 진짜 만들어진다면 억지로라도 볼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습니다.

그러다 [브랜든 티나 스토리]라는 다큐멘터리가 나왔습니다. 브랜든 티나의 일생이 다시 재조명되기 시작했고, 그 불쾌한 살인과 강간의 이미지가 저를 또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도 그 영화가 우리나라에까지 들어올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것만이 제 마지노선이었죠.

그런데 이 영화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기도 전에 킴벌리 피어스라는 젊은 감독이 브랜든 티나 스토리를 각색해 [소년은 울지 않는다]라는 영화를 만든다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영화가 만들어진 뒤에 쏟아지는 호평은 점점 저를 괴롭혔고요. 게다가 브랜든 티나로 분한 힐러리 스웽크의 모습은 너무 근사해 보였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위태로운데 라나 역은 클로에 세비니가 한다네요. 익, 정말 이 영화를 보게 되면 어쩌지? 전 어떻게든 무시하려고 했지만, 힐러리 스웽크가 수많은 여우 주연상을 휩쓸고 아카데미까지 노리기 시작하자, 결국 영화는 우리나라 극장에까지 걸렸고... 더 이상 달아날 곳이 없었습니다. 보러가는 수밖에.

2.

결국 오늘 이 영화를 보고 말았습니다. 결코 편한 경험은 아니었어요. 아마 영화의 반은 손가락 사이로 보았던 것 같습니다. 제가 왜 이렇게 바보같이 구는 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손가락 사이로 본다고 해서 화면이 가려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인터넷 평론가인 제임스 베라디넬리는 저의 경험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는 비유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극장에 앉아 [소년은 울지 않는다]를 보는 것은 질주하는 기차가 충돌하려 달려드는 걸 구경하는 것과 같다'라고 했지요. 우린 모두 브랜든 티나에게 어떤 일이 닥쳤는지 알고 있습니다. 브랜든 티나의 모험이 아무리 매혹적이어도 결국 끔찍한 강간과 살인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걸요. 영화를 어떻게 보아도 우린 마지막 비극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무척 힘겨운 관람이 되는 거죠.

정치적 이슈 역시 관객들을 괴롭히는 요소입니다. 특히 증오 범죄가 증가 추세인 미국의 관객들에게는 더욱 괴롭겠지요. 정치적 이슈는 관객들의 주의를 환기하는 것이 될 수도 있지만, 이미 그런 것들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괴로운 기억을 다시 살리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괴로움 역시 좋은 영화가 줄 수 있는 정서적 경험 중 하나입니다. [소년은 울지 않는다]를 보는 경험이 이처럼 괴로울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영화가 훌륭했기 때문이죠. 좋은 영화가 주는 괴로움은 형편없는 영화를 볼 때 느끼는 원초적 괴로움과 같지 않습니다.

3.

브랜든 티나의 스토리는 그 센세이셔널한 성격 때문에 자칫하면 제리 스프링어 쇼의 소재로 떨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관심을 끌만한 소재이기는 하지만 손쉽게 양질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소재는 아닙니다. 만약 이 영화가 소재에 진정한 애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의 손에 넘어갔다면 90년대 초에 와르르 쏟아졌던 에이미 피셔 영화들처럼 천박한 작품이 되었을 겁니다.

그러나 킴벌리 피어스는 그런 위험을 조심스럽게 피해갑니다. 피어스는 센세이셔널리즘으로 브랜든의 스캔들을 부풀릴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사건을 사회학적/심리학적 분석의 대상 쯤으로 여기는 매정한 짓도 하지 않고요. 이 영화에서 브랜든은 사랑하고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하나의 캐릭터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브랜든에 대한 피어스의 애정이 진실된 것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죠.

피어스가 그려내는 브랜든은 결코 진지하거나 지적인 인물은 아닙니다. 브랜든이 남자로 행세하고 다니는 데에는 그렇게 심오한 이유는 없습니다. 단지 그게 편하고 자연스러운 것이죠. 브랜든은 아무런 고민없이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삶의 방식을 찾아낸 것일 뿐입니다. 그의 가장 큰 매력은 그 생각없고 대책없는 천진함입니다. 이런 그의 태도는 위태롭기 짝이 없지만, 그 대책없음에는 거의 신비스럽기까지한 매력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중 브랜든처럼 사랑을 위해 그처럼 위험한 곡예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만약 브랜든이 모험의 무대를 제대로 잡았더라면 그의 자유는 영원했을 겁니다. 하지만 폴즈 시티는 결코 샌프란시스코나 뉴욕 시티와 같은 곳이 아니었지요. 그런 재주를 부리기엔 지나치게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브랜든의 종말은 시작부터 예정된 것이었습니다.

4.

피어스는 살인사건을 다루는 데도 최선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녀는 종종 이런 종류의 영화들이 떨어지기 쉬운 흑백 논리의 함정에 빠지지 않습니다. 영화에서 브랜든만큼이나 중요한 주인공은 바로 이 폴즈 시티라는 도시입니다. 인구가 5천명 정도밖에 되지 않고 경제적으로 정체되어 있는 죽어가는 마을. 재미없고 지루한 직업 속에 죽어 지내던 젊은이들이 밤만 되면 흡혈귀처럼 기어나오는 삭막한 곳. 세련된 대도시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관대함은 약에 쓰려고 찾아도 없는 곳. 폴즈 시티는 바로 그런 곳입니다. 링컨시 밖은 벗어나 보지도 못했던 브랜든에게 폴즈 시티는 흥미로운 모험의 무대였지만, 사실 이 곳은 먼지가 풀풀나는 죽은 자의 무덤과 같은 곳이었어요.

이들에게 브랜든의 정체는 얼마나 충격적이었을까요? 대도시 사람들과는 달리, 폴즈 시티 사람들은 동성애나 성전환증과 같은 것에 대해서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겁니다. 그건 산타클로스처럼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것이었죠. 그들의 편협함이 그처럼 공격적이고 격렬하게 터져 나온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영화 속에 나타난 피어스의 입장은 명확합니다. 살인자인 존 로터와 톰 니센은 태어날 때부터 안에 갇힐 수밖에 없었던 편협함과 어리석음, 무지의 피해자이기도 했습니다. 잔인하고 어리석은 일이었지만 그건 자신의 세상을 유지하려는 처절한 방어 수단이었지요. 브랜든의 입체성이 피어스의 애정에서 나왔다면, 살인자들의 입체성은 사건에 대한 그녀의 객관적인 이해에서 나온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미국적 보편성'이라고 할 만한 어떤 것을 드러냅니다. 영화는 성전환증과 증오 범죄와 같은 최근의 이슈를 다루고 있지만, 조금만 더 깊이 파면 우리는 셔우드 앤더슨의 [와인즈버그, 오하이오]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 미국 문화의 질긴 흐름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소년은 울지 않는다]는 '위대한 미국 영화'의 멤버가 될 자격을 갖추고 있는 셈이지요.

5.

그러나 [소년은 울지 않는다]는 무엇보다도 러브 스토리입니다. 그것도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고전적인 로맨스죠. 이 영화의 연인들인 브랜든과 라나는 중세 베로나의 연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편견과 증오가 쌓아놓은 담을 뚫고 열정적인 사랑을 나눕니다. 하긴 그런 게 그들 사이를 막고 있었으니 더 열정적일 수 있었겠지요. 방해가 있으면 아드레날린이 쏟아지기 마련이니까.

많은 로맨스들이 그렇듯, 브랜든과 라나의 로맨스 역시 환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브랜든의 매력은 우리의 여성 국극이나 셰익스피어의 남장 여인들, 일본의 타카라주카가 대중들에게 공식적으로 제공했던 것과 동일한 것이었죠. 그는 진짜보다 더 좋았습니다.

브랜든의 정체가 밝혀진 뒤에도 브랜든의 여자 친구들은 여전히 그에게 호의적이었죠. "그는 키스를 근사하게 했어요", "그는 여자들이 무얼 원하는지 알았어요", "전 그가 나를 숙녀처럼 대하는 것이 좋았어요." 기타 등등 기타 등등 기타 등등. 감옥 같은 삭막한 중서부에서 아무런 자존심도 없이 굴러다니던 노동자 계급 출신의 여성들에게 브랜든은 멋진 꿈이었습니다. 원래부터 남자로 태어난 그 동네 청년들은 결코 브랜든처럼 할 수 없었을 겁니다. 양쪽 모두 참 불행하게 살고 있는 거죠.

그러나 환상만으로는 완전한 로맨스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거기서 끝났다면 이 영화는 성전환한 [M. 버터플라이]로 끝났겠죠. 하지만 아이러니칼하게도 [소년은 울지 않는다]의 로맨스는 브랜든의 정체가 밝혀지고 그가 존과 톰에게 무참하게 강간당한 뒤에야 절정에 달합니다.

로맨스의 정도를 측정할 수 있는 잣대는 라나와 브랜든의 섹스신입니다. 이들은 세 번 정도 섹스를 하는데 모두 조금씩 성역할이 다릅니다. 첫번째에서 브랜든은 완전히 남자 행세를 하고, 두번째엔 라나가 그의 정체를 알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남자처럼 행동하며, 세번째에 가서야 그 모든 성적 위장이 벗겨지죠.

첫번째 섹스에서 라나의 도취는 철저하게 환상 속에 갇혀 있습니다. 그녀는 브랜든이 여자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눈치챘으면서도 그 환상을 유지시키기 위해 애써 외면합니다. 하지만 그녀가 진정으로 브랜든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뒤로 그런 허울은 더 이상 필요가 없습니다. 고전적인 로맨스가 예스럽지만 완벽한 방식으로 완성되는 순간이지요. 그들이 위장을 완전히 벗어버린 뒤 가진 세번째 섹스에는 이상한 해방감까지 느껴질 정도입니다. 생각해보면 브랜든은 이 시점에서 극적 당위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사랑은 '완성'되었으니까요.

6.

[소년은 울지 않는다]는 자칫하면 연기 스턴트로 떨어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주인공의 캐릭터가 워낙 독특하다보니 고도의 연기 테크닉을 동원해 그 기묘함만을 강조하는 쪽으로 흘러갈 수도 있어요. 사실 힐러리 스웽크의 연기를 보면서 그런 스턴트를 무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서커스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거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브랜든 티나의 캐릭터와 드라마가 단순히 서커스로 흘러가기엔 너무 인간적이어서 관객들은 곧 그 테크닉을 잊어버립니다. 둘째로 스웽크를 둘러싼 다른 배우들의 연기 역시 훌륭하며, 이들이 아주 좋은 앙상블과 성적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어서 연기 하나만 동상처럼 튈 가능성이 없는 것이죠.

모두 참 좋은 배우들입니다. 기술적으로 완벽할뿐만 아니라 정신없이 매력적이기까지 한 힐러리 스웽크의 변신이야말로 영화의 무게 중심이지만, 90년대 풍의 쿨함과 20년대 무성 영화 배우들의 몽환적인 느낌이 이상하게 결합된 클로에 세비니의 모습도 아름답습니다. 이제 정말 어른이 되어버린 브렌든 섹스턴 3세나 피터 사스가드 역시 시시한 스테레오 타입에 빠져 있지 않습니다. 게이 영화 팬들이라면 앨리슨 폴란드나 알리시아 고란슨의 모습을 보고 반가울 수도 있습니다 (폴란드는 이상할 정도로 대사가 없긴 합니다만.)

킴벌리 피어스의 연출은 조용히 배우와 사건 뒤에 숨어 있습니다. 의식적으로 영화적 테크닉을 구사하는 일은 없어요. 하지만 바로 그게 이런 이야기를 끌어내는 최상의 방법이었겠지요. 쓸데없이 재주부릴 필요가 없는 때도 있는 법입니다.

7.

[소년은 울지 않는다]는 실제 사건과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살인 사건입니다. 실제 사건에서는 세 명이 살해당했지만 영화 속에서는 두 명만 살해당한 것으로 되어 있죠. 살해당한 리자 램버트의 이름은 캔디스로 바뀌었고 다른 희생자 필립 디바인은 완전히 무시되었습니다. 아마 필립 디바인을 영화 중간에 끼워넣을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아요. 그 때문에 이 영화가 사건의 다른 이슈를 살짝 무시하는 듯한 느낌도 있습니다. 디바인은 흑인이었고 이 때문에 인종 문제 역시 상당히 중요한 이슈였습니다.

영화 당사자들도 이 영화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습니다. 가장 화를 낸 사람은 라나 티스델이었습니다. 하긴 이해가 가기는 합니다. 피어스는 꽤 많은 부분을 바꾸었으니까요. 영화 속의 라나는 어쩌다 이상한 살인사건에 말려든 중서부 노동자 계급의 보통 여성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감히 인정할만한 캐릭터는 아닙니다. 바뀐 사건 묘사도 분명 거북할 것이고요.

하지만 제가 라나 티스델이었다면 그런 소란은 피우지도 않았을 것 같아요. 클로에 세비니와 같은 좋은 배우가 저를 그렇게 시적이고 아름답게 연기를 해냈다면 죄스러워서라도 못하죠. (00/03/13)

DJUNA

기타등등

당시 라나 티스델이 계속 브랜든을 3인칭 남성 대명사로 지칭하는 것을 보고 재미있어 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보세요, 저 역시 그래버렸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