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회 Brief Encounter (1946) * * * *

감독
데이빗 린 David Lean

주연
실리아 존슨....로라 제슨
Celia Johnson....Laura Jesson
트레버 하워드....알렉 하비 박사
Trevor Howard....Dr. Alec Harvey
스탠리 할로웨이....앨버트
Stanley Holloway....Albert
조이스 캐리....머틀 바곳
Joyce Carey....Myrtle Bagot
시릴 레이몬드....프레드 제슨
Cyril Raymond....Fred Jesson
에벌리 그렉....돌리 미시터
Everley Gregg....Dolly Messiter
마가렛 바튼....베릴 월터즈
Margaret Barton....Beryl Walters
데니스 하킨....스탠리
Dennis Harkin....Stanley
발렌타인 다이알....스티븐 린
Valentine Dyall....Stephen Lynn
마조리 마스....메리 노튼
Marjorie Mars....Mary Norton
아이린 핸들....오르가니스트
Irene Handl....Organist

1.

누구에게나 로맨티시즘에 대한 상이 있기 마련인데, 저한테는 [밀회]가 바로 그런 상을 만들어 준 영화입니다. 지금도 '로맨스'라는 단어를 들으면 떠오르는 것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과 배경에서 피어오르는 기차 연기입니다. 물론 주인공들은 실리아 존슨과 트레버 하워드 정도 나이는 되어야 하죠. 아직도 제 머리 속에서는 젊음과 로맨스가 잘 연결되지 않습니다. 이것도 아마 영화 후유증이라면 후유증이겠죠.

2.

몇 주 동안 동네방네 돌아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들을 붙잡고 이 영화 광고를 해댔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이 영화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터라 광고에 줄거리 소개도 달아야 했죠. "음, 유부녀랑 유부남이 역에서 만나서 연애를 하다가 나중에는 죄책감을 느껴서 가족한테 돌아가." "그게 다야?" "응." "그게 뭐야?"

정말 그렇긴 그래요. [밀회]의 줄거리는 세상에서 가장 뻔한 이야기 중 하나니까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영화 역시 뻔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뻔한 줄거리 때문에 이 영화의 멋진 만듦새가 더 눈에 잘 들어오는 거죠.

3.

[밀회]는 데이빗 린의 대표작 중 하나지만, 저한테는 이 영화가 데이빗 린보다는 노엘 카워드의 영화처럼 여겨집니다. 사실 린의 초기 영화들은 모두 노엘 카워드의 작품 같습니다. 린의 기가 막힌 솜씨가 아니었다면 결코 이런 영화들이 만들어질 수 없었겠지만 그거야 머리 속에서만 돌아가는 생각이고, 영화를 보는 동안 제가 느끼고 경험하는 것은 매우 카워드적인 대사들과 캐릭터들이 만들어내는 카워드식 세계입니다.

그리고 이 모두가 얼마나 절묘한가요. 흔한 함정인 센티멘탈리즘이나 투정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카워드의 심리분석은 잔인할 정도로 냉정합니다. 특히 로라를 보세요. 로라는 로맨틱한 이야기의 주인공이지만 카워드는 그녀의 이기심, 속물성, 속좁음과 같은 단점들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흐 2번의 물결치는 로맨티시즘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니 입이 딱 벌어질 뿐이죠.

게다가 이야기를 다루는 방법은 얼마나 근사한가요. 간단한 플래시 백을 이처럼 강렬한 무기로 이용하는 영화도 찾기 힘듭니다. 플래시 백은 흔히 시작부터 에너지를 반쯤 잃은 것을 각오해야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오히려 정반대가 됩니다. 여주인공 로라가 바로 그 격렬한 폭풍 속에서 빠져나온 지 겨우 몇 시간도 되지 않는 터라 로라의 회상에는 아직도 뜨거운 감정의 입김이 묻어있으니까요.

로라와 알렉의 이별을 도입부에서 3인칭으로 묘사한 뒤 나중에 1인칭으로 반복하는 방식도 훌륭합니다. 처음에는 건조하게 묘사되었던 모든 제스쳐들이 반복되면서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며 새로운 클라이맥스를 형성하죠. 특히 급행열차 에피소드가 주는 정서적 충격은 대단합니다.

4.

트레버 하워드는 좋은 배우이고 이 영화에서 그가 보여주는 연기도 훌륭합니다. 하지만 이 역은 아마 다른 배우들도 잘 해낼 수 있었을 거예요. 대충 생각해보니 제임스 메이슨, 존 길거드, 알렉 기네스, 로렌스 올리비에와 같은 이름들이 떠오르는군요.

하지만 실리아 존슨말고 다른 누가 로라 역을 할 수 있었을까요?

좋은 배우들이 겹겹으로 쌓인 나라니 존슨이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그 역을 훌륭하게 해냈었겠지만 상상하기 힘든 건 마찬가지입니다. 한마디로 존슨이 너무나도 좋아서 상상력이 존슨 주위에 바리케이트를 쳐버리고 멈추어 버린 것이죠. 일단 실리아 존슨의 커다랗고 표현력이 풍부한 눈과 경이로울 정도로 영국적인 섬세한 얼굴은 라흐 2번만큼이나 이 영화와 닿아있습니다. 자살 직전까지 갔다 왔으면서도 결코 냉정함과 위트를 잃지 않는 로라의 나레이션 역시 실리아 존슨의 냉철한 목소리에 의해 더욱 강화됩니다 (더빙판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경험이죠.)

'배경' 역의 나머지 조역들도 훌륭합니다. 참, 다시 보니 스탠리 할로웨이가 역무원으로 나오더군요. 전에는 몰랐었는데.

5.

[밀회]가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그건 로맨스의 제조 방식과 관계 있습니다. 로맨스란 장식적인 것이 아니라 감정적인 것이며, 로맨스를 극대화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솔직하고 사실적이 되는 것이라는 거죠. 장식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로맨스의 기둥은 살아숨쉬는 사람이니까요. (98/12/13)

DJUNA


기타등등

한동안 비디오가 절판되어 안나왔던 영화죠. 비디오를 구하고 싶으신 분들은 조금만 더 기다리시길. 곧 (아마 올해 안에) DVD가 나올 예정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