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안병기

주연
김규리....이은주
이세은....이유진
이유리....김인숙
최성민....한재훈
최정윤....호경
이응경....유진모

유진

전 정말 안병기의 [분신사바]에 기대를 했습니다. 제가 이 영화를 좋아하게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최소한의 기본기는 하는 장르 영화는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럴만도 하지 않나요? 안병기는 호러 장르에 대해 알만큼 아는 전문 장르 감독입니다. 늘 단점이었던 각본도 어느 정도 장르팬들의 인정을 받은 이종호의 원작이 커버해 줄 수 있을 거고요. 기획만 따진다면 [분신사바]의 계획은 철근 콘크리트처럼 단단했습니다.

그래서 전 일단 수상쩍은 징조들을 외면하기로 했습니다. 스토리와 설정이 [여고괴담]과 지나치게 닮아도 모른 척하기로 했고 하나씩 소개되는 스틸 사진마다 사다코가 찍혀 있어도 그러려니 했어요. 촬영장이었던 학교에서 들려오는 예쁘지 못한 소문들은 조용히 무시하기로 했고요.

오늘 전 막 [분신사바]의 시사회를 보고 왔습니다. 어땠냐고요? 그 징조들을 무시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분신사바]는 지금까지 나온 안병기의 영화들 중 가장 밋밋합니다. [가위]나 [폰]은 제 맘에 완전히 들지는 않았어도 밋밋한 영화는 아니었어요. 아무리 나빠도 재수없거나 불쾌한 느낌 정도는 남겼지요. 하지만 [분신사바]는 그런 것도 없습니다. 영화는 그냥 투명해요. 영화가 끝나고 나면 도대체 뭘 봤는지도 기억이 안 날 정도랍니다.

도대체 기대했던 원작의 힘은 어디로 갔을까요? 흠... 전 아직 이종호의 [모녀귀]도, 새로 개정된 [분신사바]도 읽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원작의 영향력이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인지는 아직 말할 수 없어요. 하지만 이 점은 분명합니다. 남의 원작을 취한 것이 안병기에게 결코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는 거죠. 둘은 서로를 보완하는 대신 서로를 깎아먹기만 합니다.

줄거리 소개를 할까요? 서울에서 이사온 전학생 유진은 친구들과 함께 분신사바 주문을 외워 자기를 괴롭히는 학생들을 막으려 합니다. 그런데 그 주문을 건 뒤로 그 학생들이 비닐 봉지를 머리에 뒤집어 쓰고 불을 붙여 자살하는 일들이 일어나죠. 그리고 그 사건 뒤에는 30년전 마을에서 벌어졌던 끔찍한 비극의 진실이 숨어 있습니다.

[분신사바]의 '이야기'는 [가위]나 [폰]에 비해 비교적 치밀한 편입니다. 스토리는 비교적 안정된 페이스로 꾸준히 진행되고 미스터리는 새롭지 않아도 극적 구조 안에 비교적 자연스럽게 녹아있습니다. 영화의 폭력적인 사건들을 정당화할 분노의 감정도 충분하고요.

그러나 각본은 여전히 나쁩니다. 가장 큰 문제는 대사예요. 지금까지 3편의 영화들을 보았으니, 전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가지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각본가 안병기는 대사들을 가려낼 수 있는 귀가 없습니다. 제발 부탁이니 다음 영화에서는 다른 각본가들을 고용하시길. 그게 맘에 안 든다면 최소한 프랑스식 대사 작가라도 기용하거나요. [분신사바]의 대사들은 최악이었던 [폰]보다 아주 조금 낫지만 그래도 결과는 참담합니다. 사실적인 느낌도 없고 정확한 의미도 제공하지 못하는 어설픈 문장들의 연속이죠.

영화는 원래의 이야기 속에 녹아있는 가능성을 대부분 날려버리기도 했습니다. 허겁지겁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 정신이 없는 각본은 어느 것도 분명히 하지 못합니다. 편협한 소집단의 편견과 폭력을 보여주지도 못하고, 유령의 저주에 의해 희생당하는 사람들의 공포도 보여주지 못하며, 부당하게 희생당한 딸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도 보여주지 못해요. 영화는 그냥 주어진 이야기를 생각없이 합니다. 흐름에 따라 유진, 은주, 재훈, 호경으로 주인공들을 옮겨가면서요. 이들 중 어느 캐릭터도 제대로 그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관객들은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감정이입을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죽으면 죽는 거고, 귀신에 들리면 들리는 거죠. 알게 뭐예요.

더 나쁜 건 영화가 허겁지겁 남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동안 영화적 창의성까지 날려버렸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안병기와 안이함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습니다. 그는 아이디어가 넘쳤고 언제나 필요 이상의 노력을 영화에 쏟아부었습니다. 그게 표절이건 인용이건 독창적인 아이디어건 간에요. 하지만 이 영화는 그냥 무개성적이고 나태합니다. 영화가 흘러가는 동안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여고괴담] 무대를 돌아다니는 사다코들입니다. 올해 수많은 사다코 영화들이 나왔지만 [분신사바]는 그중 가장 노골적입니다. 비주얼만 흉내냈던 [령]이나 [페이스]와는 달리 [분신사바]는 심지어 설정까지 같아요. 초능력자의 살해당한 딸이 무차별적인 복수를 한다는 이야기잖아요!

배우들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악평을 삼가고 싶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기 일을 했어요. 이 영화에서 그들이 자기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 건 늘 귀신처럼 매달려 발목을 잡아당기는 안병기의 각본 때문일 가능성이 크니까요. 솔직히 연기 지도에도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안병기는 여전히 장르세계의 추상성과 현실세계의 일상성을 어떻게 결합하는지 모르고 있어요.

결론을 말한다면 [분신사바]는 거의 모든 면에서 실패작입니다. 최소한의 기본도 못한 [령]이나 [페이스]보다는 조금 나아요. 하지만 한국 호러 영화계의 대표주자가 만든 신작의 유일한 장점이 그 영화들보다 나은 거라면 이건 좀 심각하죠. 영화는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으며, (오호 통재라!) 결정적으로 하나도 무섭지 않습니다. 심지어 같은 날에 시사회를 한 [인형사]가 무섭다면 더 무서웠어요. (04/07/26)

DJUNA

기타등등

1. 원작 [분신사바]는 주말에 주문했으니 내일 쯤 도착하겠죠. 책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겠습니다.

2. 이응경과 최정윤이 같은 영화에 나왔으니 [똑바로 살아라]의 동창회처럼 보이는 것도 당연하겠죠?

3. 이 영화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건 끝도 없이 등장하는 서클 렌즈들입니다. [분신사바]보다는 [돌연변이 서클 렌즈들의 습격]이 더 어울리는 제목이에요.

4. 하지원의 카메오는 최종 편집본에선 삭제되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