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박기용

주연
박명신
이대연

정사 이후

얼마 전, [낙타(들)]의 감독 박기용은 [사이트 앤 사운드]지를 위해 열 편의 영화들을 뽑았습니다. 후 샤오시엔 하나, 키에슬로프스키 하나, 안토니오니 하나, 오즈 하나... 히치콕이나 존 포드의 영화들도 하나씩 있지만, "이 사람 영화를 한 번 볼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 리스트는 충분한 경고 역할을 합니다. 증오스러울 정도로 조용한 배우들이 무덤덤한 스토리와 몇 분씩 끄는 롱테이크에 갇혀 있는 걸 구경하는 게 의미있는 예술적 경험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사람 영화를 건너 뛰라는 거죠. 하긴 [모텔 선인장]을 본 사람들은 벌써 각오하고 있었겠지만.

[낙타(들)]은 [모텔 선인장]의 가능성을 극도로 확장한 영화입니다. [모텔 선인장]에는 그래도 정우성이나 진희경 같은 스타들이 있었고, 크리스토퍼 도일이라는 거장이 촬영을 맡았으며, 관객들의 호기심을 끄는 섹스라는 소재가 있었습니다 (물론 그걸 보려고 온 사람들은 다들 실망하고 돌아갔지만요.) 하지만 이 영화엔 스타나 관심을 끌만한 이슈는 없습니다. 아니, 스타가 뭐예요. 무명 연극 배우 둘과 10명의 스탭들을 2주일 동안 끌고 다니며 흑백 디지탈로 벼락같이 찍은 영화인 걸요. 주류 영화의 껍질이 모조리 떨어져 나가자 영화는 드디어 자기만의 언어와 색을 찾습니다.

[낙타(들)]은 두 중년 남녀의 이틀에 걸친 외도를 따라갑니다. 여자는 약사이고 남자는 손님이었던 것 같아요. 둘 다 가족이 있는 이 아줌마 아저씨들은 남자의 친구가 빌려준 차를 타고 서해의 월곶으로 떠납니다. 그들은 거기서 바다도 보고 회도 먹고 노래방에서 노래도 부르고 모텔에서 섹스도 합니다.

영화는 무척 교활하게 즉흥성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저 각 시퀀스 별로 간단한 설정만 갖다놓고 배우들에게 거의 즉흥 연기를 시켰던 모양이에요. 배우들은 밥상을 앞에 놓고, 또는 차 안에 앉아서 일상적인 대사들을 수줍게 늘어놓는데, 그게 굉장히 사실적이어서 거의 다큐멘터리 분위기를 풍깁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즉흥 연기의 자유로움을 느끼긴 힘듭니다. 배우들은 시퀀스 내에서는 어느 정도 대사와 행동을 선택할 자유가 있지만, 결국 설정 안에 꽉 얽혀 있습니다. 극도로 정적인 카메라의 움직임도 배우들의 행보를 막고요. 어떻게 보면 영화 전체가 유치장에 갇힌 사람들의 잡담처럼 보이기도 해요. 주인공들은 장기적으로는 앞이 꽉 막혀 있는 그네들의 인생에, 단기적으로는 별다른 열정도, 희망도 보이지 않는 불륜에 갇혀 있으면서 일상적인 대사들로 애써 그 사실을 외면하려하고 있습니다. 배우들이 즉석으로 읊어대는 대사들은 그렇게까지 큰 의미가 없는 셈이죠. 중요한 건 그들의 어색함과 소통의 불편함입니다.

[낙타(들)]은 참으로 건조하고 황량한 영화입니다. 우리가 불륜 영화에서 기대할만한 화끈한 섹스나 불타는 로맨티시즘 따위는 약에 쓰려고 해도 찾아볼 수 없죠. 고정된 카메라 앞에서 펼쳐지는 둘의 섹스신은 관객들이 질식할 정도로 갑갑합니다. 이들이 조심스럽게 펼치는 일탈의 모험은 그들을 어디로도 인도하지 않습니다.

네, 이쯤해서 여러분은 60년대 유럽 모더니즘 영화의 세례를 받은 아시아 아트 하우스 영화의 고정된 패턴을 읽을 수 있을 겁니다. 저 역시 [낙타(들)]이 특별히 새로운 영화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군요. 반대로 주제에서부터 형식의 선택에 이르기까지 거의 교과서적인 영화입니다. 다행히도 영화는 결과가 상당히 좋습니다. 아무리 교과서적이라고 해도 영화의 황량함은 인상이 아주 강하고, 절제된 흑백 디지탈 화면은 그 고유의 방식으로 아름답습니다.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주는 느낌이 텅빈 허망함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 허망함은 강렬합니다. (02/09/18)

DJUNA

기타등등

종종 대사를 알아듣기 힘들더군요. 어떤 때는 영어 자막으로 본 관객들이 더 유리할 지경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