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피나 토레스 Fina Torres

주연
아리아드나 힐....아나
Ariadna Gil....Ana
아리엘 돔바슬....셀레스트
Arielle Dombasle....Celeste
에블린 디디....알카니
Evelyne Didi....Alcanie
프레데릭 롱브와....아르망
Frederic Longbois....Armand
루이스 오마르....이탈로 메디치
Lluís Homar....Italo Medici
알마 로사 카스텔라노스....루실라
Alma Rosa Castellanos....Lucila
샹탈 아이메....티나
Chantal Aimee....Tina
도미니크 아벨....가비
Dominique Abel....Gaby
이데가르 가르시아 마드리즈....투투
Hidegar Garcia Madriz....Toutou
올리비에 그라니에....클로드
Olivier Granier....Claude
미셸 드브란....그리고리에프
Michel Debrane....Grigorief

0. 천상의 음악

중세까지만 해도 서구 사람들은 투명한 수정구들로 이루어진 예쁘장한 우주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완벽하게 균형잡힌 이 우주라는 자그만 기계는 조화로운 천상의 음악을 연주하며 찰칵찰칵 시계처럼 정확하게 돌아갔습니다. 아쉽게도 이 천상의 시계장치는 역시 그만큼이나 아름답긴하지만 시적인 요소는 조금 부족한 뉴튼의 새로운 우주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말았지만요.

1. 천상의 시계장치

결혼식장에서 '예'라고 말하기 직전에야 자신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아나는 허겁지겁 교회에서 도망쳐 나와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로 베네주엘라를 떠나 프랑스로 날아갑니다. 아나가 그제서야 알아차린 그녀의 진짜 운명은 그녀의 우상인 마리아 칼라스처럼 오페라의 프리마돈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네 명의 베네주엘라 여자들이 북적대는 방에 자리를 잡은 아나는 러시아인 성악 교사 그리고리에프 아래에서 음악수업을 받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때 잘나가는 영화 감독 이탈로 메디치가 로시니 오페라의 영화판 [라 체네렌톨라]의 여주인공을 뽑는다는군요. 당연히 아나는 그 역을 따내고 싶어하지만, 아나가 잘되는 걸 차마 눈뜨고 못보는 못돼먹은 비디오 아티스트 셀레스트가 훼방을 놓기 시작하지요.

이민국 직원들이 쫓아다니고 셀레스트의 음모가 앞길을 떡칠하지만, 아나 쪽 상대도 만만치 않습니다. 아나와 사랑에 빠진 라캉 파 정신분석의 알카니와 아프리카인 주술사 투투, 동성애자인 점성가 아르망의 도움을 받아, 아나는 천상의 시계가 그녀에게 운명지어준 찬란한 미래를 향해 뛰어듭니다...

2. 신데렐라

말할 필요도 없이 [천상의 시계장치]는 신데렐라 이야기입니다. 물론 시대가 바뀌었으니 옛날 그대로일 수는 없습니다. 왕자는 대머리 영화 감독이고 신데렐라는 그와 결혼하는 대신 오페라 가수가 되며 착한 대모는 주술사와 정신분석의이고 신데렐라와 착한 대모는 동성애 애인 사이입니다. 유리 구두는 녹음 테이프로 변신했고요.

이렇게 뒤틀어놨으니 여기서 뭔가 '이즘'이 섞인 재해석을 바라시는 분들도 있을 듯 한데, 다행스럽게도 이 영화는 '의식적'으로 그런 것을 외치는 진지한 영화가 아닙니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신데렐라 따위를 재해석 해봤자 뭐가 나오겠어요. 기껏해봐야 MBC에서 하는 [신데렐라] 정도겠죠. 피나 토레스가 대충대충 쓱싹쓱싹 생각없이 만든 이 영화는 솜사탕처럼 가볍고 경박하며 유치찬란함은 [뽀뽀뽀]를 능가합니다.

사실, 이 영화 속의 유머들은 터무니 없을 정도입니다. 투투가 만든 사랑의 묘약을 잘못 들이켜 아나와 사랑에 빠진 알카니의 마음 속을 들여다보면 그 고상한 학자 아줌마가 춤추고 노래하는 뮤직 비디오가 나옵니다. 악역 셀레스트가 등장하자 등 뒤에는 먹구름이 깔리고 번개가 번쩍이더니 나중에는 마징가 제트처럼 눈으로 광선까지 쏩니다.

물론 이 영화의 장점이 바로 이 유치찬란함과 제약없는 경박함이니 이런 것들이 신경에 거슬린다면 당장 비디오를 꺼버리거나 영화관에서 나와야지요. 그러나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내용이 어찌되었건, [천상의 시계장치]는 흥겹고 유쾌하며 영화 전체를 흐르는 자유롭고 선량한 정신은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주기 충분합니다.

3. 로시니, 슈베르트, 살사

그리고리에프를 처음 만났을 때 아나가 물어요. "로시니를 부를까요?" 그때 들려온 매서운 답변 --> "이탈리아 인들은 안돼! 음악은 진지한 거야!"

하지만 그리고리에프가 원한대로 아나가 슈베르트만 죽어라고 불러댔다면 영화의 분위기가 영 안 살았겠지요. 로시니의 방정맞은 음악은 영화 전체에 잘 어울리고 또 로시니는 오페라판 신데렐라인 [라 체네렌톨라]를 작곡하지 않았나요? 단지 이 경우, 아나의 우상이 칼라스라는 게 이치가 좀 맞지 않지요. 칼라스는 [라 체네렌톨라] 를 한 번도 부른 적이 없다니까요!

슈베르트와 로시니 이외에 영화의 주도를 잡는 것은 살사 음악입니다. 살사는 이 영화를 보다 잡탕으로 만들뿐만 아니라 국적 또한 부여합니다.

4. 마술

남미 예술작품들을 평할 때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말이 지나치게 낭비된다는 생각을 가끔하지만, 도대체 다른 말을 찾을 수가 없군요. 정신분석의와 주술사가 공존하고, 미약과 마술이 이민법과 위장 결혼이라는 현실적인 상황 속에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가는 이 꼬락서니를 다른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런지? 물론 그 절정은 아나가 벽에 붙여놓은 칼라스 포스터가 사진 주제에 뻔뻔스럽게도 노래를 시작할 때겠지요!

5. 파리의 베네주엘라인

피나 토레스에 대해 저희가 더 잘 알면 말이 더 잘 풀릴텐데 말이에요. 저희가 아는 것은 이 사람이 20년 동안 파리에서 살아온 베네주엘라 여성으로, 1985년에 [오리아나]라는 심각한 영화로 칸느에서 황금 카메라 상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 [천상의 시계장치]가 93년에 만든 이 사람의 두번째 영화라는 것, 그리고 그 동안 아마도 꾸준히 비디오 작업을 해왔다는 것... 대충 이 정도인 거 같아요.

적어도 저희가 가진 정보 두 개는 도움이 되는군요. 이민법과 씨름하는 파리의 외국인들에 대한 애정어린 묘사는 분명히 그 사람이 가장 잘 아는 대상이기 때문에 가능했겠지요. 못돼먹은 셀레스트와 그 사람이 만드는 황당한 비디오 작품들은 분명 토레스 자신을 반영하는 것이겠고요.

이야기가 어찌되었건 간에, 파리 구석에 박힌 이 잡다한 문화를 맛보는 것은 분명 즐거운 일입니다. 대사들은 쉴 사이 없이 스페인어, 불어, 영어, 이탈리아 어 사이를 오가고 나오는 사람들은 잘나가는 정신 분석의와 영화 감독부터 웨이터와 권투선수까지, 동성애자에서부터 스트레이트까지 퍼져있지요. 잡다한 재료와 요리법으로 만든 남미 요리를 맛보는 기분이에요.

6. 사랑과 결혼

"안녕하세요, 전 알카니의 친구인데요, 혹시 독신이세요? 그렇다면 저랑 결혼해주시겠어요?"

전형적인 [그린 카드]식 상황이지요?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의 주인공이 위장 결혼하는 상대가 동성애자인 웨이터라는 것 그리고 그 상황에 이르기 조금 전에 그녀가 미약을 먹고 갑자기 레즈비언이 되었다는 것이겠지만요. 물론 그건 그보다 조금 전에 실수로 레즈비언이 된 알카니 때문이었지만. 이 모든 소동은 성별을 안가리고 마구 영향력을 행사하는 투투의 놀라운 명약이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토레스는 이 영화에서 의도적으로 성을 뒤섞으며 즐기는 것 같아요. 투투가 만든 사랑의 묘약은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경우인데, 사실 이 아이디어는 그렇게 신선하다고 할 수는 없지요. 여러분도 수많은 Y물 순정만화에서 "왕자가 사랑의 묘약을 마시고 다른 왕자와 사랑에 빠지고 어쩌고 저쩌고..."하는 상황들을 한두번 이상 보았을 거예요. 사실 그 아이디어의 진부함에 기가 차기까지 할 걸요.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는데, 일단 이 아이디어가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태평스럽고 빠르게 전개되기 때문이고 두번째로는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복합문화 + 다민족 사회에서는 어떤 일이건 이상할 게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7. 배우들

가장 눈에 뜨이는 사람은 역시 여자 주인공 아나를 연기한 아드리아나 힐입니다. 이 스페인 배우는 [아름다운 시절]의 네 자매들 중 한 명으로도 나왔으니 낯이 익은 분들도 많으실 거예요. 하여간 젊은 시절의 레슬리 캐론을 연상시키는 풋풋한 소년 같은 이미지 때문에 이 약간 맛이 간 바이섹슈얼 신데렐라 스토리에 아주 잘 어울립니다.

힐의 풋풋한 느낌은 못된 새 언니 셀레스트를 연기한 아리엘 돔바슬의 날카로운 이미지와 대조를 이루는데, 자기 일을 잘하는 악역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이 영화의 셀리스트도 그렇게 밉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8. 그리고...

[천상의 시계장치]는 얄팍하고 덜 떨어지고 촌스럽고 생각없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 영화의 유쾌하고 흥겨운 분위기 속에 녹아들어서 보는 재미가 만만치가 않습니다. 세상엔 헐리웃 액션 영화말고도 수많은 킬링 타임 용 영화가 있습니다.

[천상의 시계장치]의 난장판은 86분 동안의 순수한 오락을 선사합니다. 마치 카니발에 휘말려 들어갔다 빠져 나온 기분입니다. :-) (97/07/08)

D&P

기타등등

위에 적힌 날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글은 [에버 애프터]가 개봉되기 전에 쓰여졌습니다. 하지만 생각이 바뀐 건 없어요. [에버 애프터]가 '이즘' 때문에 성공한 영화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