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다쟁이 악당

1.

제임스 본드 영화에 늘 나오는 상황이지만 결코 본드 영화의 특허품만은 아닙니다. 대충 이렇게 전개되죠. 본드가 악당 졸개들한테 잡혀서 끌려 옵니다. 악당 두목은 미치광이처럼 웃으면서 "나는 이렇게 하고 요렇게 하고 저렇게 해서 세상을 정복할 것이다!"라고 친절하게 자신의 계획을 설명해줍니다. 악당이 자기 연설에 취해 있는 동안 주인공은 잽싸게 수갑이나 밧줄을 풀고 비밀무기를 꺼내 지구를 구합니다.

도대체 이 악당들은 왜 이런 짓을 하는 걸까요? 모든 클리셰들이 그렇지만 이 역시 생각하기 귀찮은 작가들의 편이성을 위해서입니다.

우선 주인공에게 빠져나가기 힘든 위기를 제공하면서도 기회 역시 동시에 제공해야 한다는 복잡한 상황을 만족시키기에 이처럼 손쉬운 도구가 없습니다. 위기와 시간 여유를 동시에 주는 장치니 참으로 금덩이 같다고 하지 않을 수 없죠.

하지만 여기엔 그것보다 더 중대한 목적이 있습니다. 어떻게든 각본가는 악당의 복잡한 음모를 관객들에게 알려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악당들의 대사로 그냥 알려주면 극적 재미가 떨어집니다. 주인공에게 밝혀내게 하는 방법도 있지만 이렇게 하면 추리극이 되고 추리물을 만들려면 작가가 머리를 써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에 주인공이 어떻게 진상을 밝혀낸다고 치더라도 그게 맞는지 안 맞는지를 설명해 줄 사람은 악당 밖에 없습니다. 결국 악당의 연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제 그 연설을 넣어야 할까요? 주인공에게 잡힌 뒤라면 곤란합니다. 대부분 악당들은 영화 속에서 죽기 때문에 잡히는 일 따위는 없거든요. 만약 살아서 잡힌다고 하더라도 그 상황에서 친절하게 자기 음모를 설명해줄 리가 없습니다. 결국 악당이 가장 자발적으로 설명할 만한 시점은 악당이 주인공보다 철저하게 우위에 있을 때 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이 진부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매우 그럴싸합니다. 매우 있을 법한 일이란 말이죠.

생각해보세요. 이 과대망상증 환자인 악당은 일종의 예술가입니다. 그는 어떻게든 자기 예술작품을 과시하고 싶어하죠. 하지만 다른 예술과는 달리, 범죄자는 자신을 대중에게 공개할 수 없습니다. 예술가에겐 필수적인 비평가의 칭찬을 받을 기회가 없는 거죠.

그렇다면 이 경우, 누가 비평가일까요? 당연히 주인공입니다. (체스터튼도 말했지요, "범죄자가 예술가라면 탐정은 비평가에 지나지 않지.") 그렇다면 악당들이 주인공으로부터 "이 사악하고 못되먹고 추악하지만 영리하고 대단한 괴물아!"라는 말을 듣고 싶어하는 건 당연하고 지당한 일입니다. 게다가 그는 지금 자기 앞에 잡혀서 죽기 일보직전이 아닙니까? 그에게 말해도 음모가 노출될 염려는 없는 겁니다.

게다가 악당들은 대부분 새디스트일테니까 이런 연설은 주인공을 괴롭혀 자신의 새디즘을 만족시키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모로 편한 거죠. 주인공에게 탈출할 수단이 있다는 것만 뺀다면 말이죠.

2.

'수다쟁이 악당'은 점점 그 설 자리를 잃고 있습니다. 이유는 여럿 있죠. 일단 본드 악당들이 너무 많이 써먹어서 우스꽝스러워졌습니다. 게다가 요새는 세상을 정복하려는 악당들이 많지 않아서 그렇게 주인공을 붙들어 놓고 자기 광고를 할 필요도 줄어들었습니다. 영화의 패턴도 바뀌었지요. 요새 영화는 본드 시대와는 달리 매우 직설적이어서 본드식 거대 악당의 장황한 연설은 작위적이고 어설퍼 보입니다.

패러디로는 아직 종종 사용됩니다. [트루 라이즈]의 악당 아지즈가 "우리도 이제 핵을 가졌다!" 어쩌구의 장황한 연설을 하는 동안 녹화 중인 캠코더의 배터리가 닳아버리는 따위의 장면이 대표적이죠. 그러나 비슷한 부류인 '복잡한 함정' 클리셰와는 달리 활용 범위가 그렇게 넓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수다쟁이 악당'이 구닥다리로 완전히 물러날 것 같지는 않습니다. 훌륭하고 개성적인 악당 배우라면 이런 어색한 상황도 아주 자연스럽게 해내 영화에 힘을 더해줄 수 있기 때문이죠. 물론 그 성과가 그렇게 훌륭하다면 그것은 더이상 클리셰가 아닙니다. (99/02/11)

D&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