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한 함정

1.

[바이오닉 우먼]에서 예를 하나 뽑아보죠. 제이미 소머즈가 악당의 초대를 받아 요트로 갑니다. 악당이 준 수면제를 탄 술을 마신 제이미는 정신을 잃습니다. 그러자 악당들은 정신을 잃은 제이미를 나무통에 담아 추를 달고 바다 속에 떨어뜨리죠. 물 속에서 정신을 차린 제이미는 기계 팔로 통을 때려부수고 빠져 나옵니다.

[어벤저]에도 비슷한 예가 수두룩합니다. 악당들은 몰래 사진관으로 숨어들어온 엠마를 클로로포름으로 기절시킵니다. 악당들은 알리바이를 만든답시고 엠마를 의자에 묶고 문을 열면 총이 발사되는 장치를 만든 뒤 빠져나옵니다. 물론 엠마를 구출하러 온 스티드는 그 함정을 알아차리고 창문으로 들어오죠.

액션 시리즈가 많았던 6,70년대 텔레비전 시리즈는 이런 예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클리셰들은 다시 무성 영화 시대로 거슬러 갑니다. 기찻길에 묶여 백마탄 기사, 아니 카우보이를 기다리던 수많은 여주인공들이 아마 그 선조 쯤 되었을 겁니다.

특히 스튜디오 독점 시대의 시리즈 영화들에게 이런 클리셰는 밥줄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일주일에 한 편 간격으로 상영되었던 이 영화들은 대부분 복잡한 함정에 갇힌 주인공을 보여주고 그 편을 끝냈습니다. 아이들은 달콤한 흥분으로 일주일을 보낸 뒤 다시 극장으로 찾아옵니다. 그럼 다음 편의 도입부에서 주인공은 함정에서 빠져 나오고 아이들은 환성을 지르는 거죠. 물론 그 함정에서 빠져나오게 만들기 위해 감독들은 온갖 사기를 쳐야 했습니다.

이본느 라이너의 [살인 그리고 살인]에는 그런 시리즈 영화를 언급하는 재미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인공 도리스는 애인인 밀드레드 앞에서 액션 시리즈 주인공인 '로켓맨'을 보았던 추억을 퍼포먼스로 보여줍니다. 분명히 전편에서는 정신을 잃고 묶인 채 떨어지는 기차 안에 갇혀 있던 로켓맨이 후편에서는 기차가 떨어지기도 전에 탈출하는 게 아닌가요?!!! 배반당한 어린 도리스는 외칩니다. "너네들 다 장님이니? 로켓맨은 떨어져 죽었어! 이건 모두 거짓말이야!"

2.

왜 이런 것들이 애호되었던 걸까요? 가장 기초적인 이유는 '수다쟁이 악당'과 같습니다. 주인공에게 위기와 또 거기서 빠져나올 기회를 동시에 주기 위해서였지요. 이런 함정은 충분히 상황을 자극적으로 만들면서도 노골적인 폭력을 배제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한가하고 복잡한 함정은 또 주인공의 미묘한 실력을 발휘할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맥가이버]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악당들은 맥가이버를 온갖 잡동사니가 가득 찬 창고 안에 가둡니다. 그러면 맥가이버는 잡동사니로 레이저 총을 하나 만들어 그걸로 문을 부수고 빠져 나오죠. 본드에게도 이런 함정은 첨단 무기의 실험장이었습니다.

원더우먼이나 수퍼맨처럼 신분을 위장하고 있는 수퍼 히어로한테도 이런 함정은 필수적이었지요. 악당들이 없는 동안 옷 갈아 입을 기회를 얻을 수 있었으니까요.

괴상망칙한 함정처럼 수퍼 히어로들의 실력을 보여주기에 좋은 장치도 없었습니다. 구조 플롯에도 적절한 서스펜스를 주는 도구가 되고요. 특히 시한 장치(로저 이버트가 죽도록 싫어하는 클리셰입니다)는 이 클리셰의 구세주였죠. 시한 폭탄은 0시를 향해 달려가고 그 옆에는 꽁꽁 묶인 여주인공이 누워 있는 거죠. 1분 안에 폭탄을 해제하거나 여주인공을 구해 빠져 나오지 않으면 모든 게 끝장납니다. 뻔하지만 여전히 손에 땀이 쥐어지지 않나요?

3.

여기에는 아주 강한 에로티시즘도 숨겨져 있었습니다. 복잡한 함정은 다양한 페티시즘의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물에 젖은 속옷만 입고 물레방아에 묶인 [롱키스 굿나잇]의 지나 데이비스를 떠올려 보세요. 꼭 본디지 페티시스트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자극적으로 느낄 만하죠.

70년대 텔레비전 시리즈에 툭하면 등장하곤 했던 클로로포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인공을 마취시키기 위해서는 신체 접촉이 필수적이었고 그 결과 그 장면들은 묘하게 에로틱해졌습니다. 정신을 잃는/잃은 주인공의 모습이 약한 수준의 시체음란증을 자극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장면들의 페티시즘은 무성 영화 시대의 프랑스 시리즈 [흡혈귀들]에서도 등장하니 역시 상당히 오래되었다고 해야겠습니다. 물론 소설로 거슬러가면 더 오래되었겠죠.

이런 장면들은 꼭 스트레이트 남성만을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끝없이 납치당하며 배트맨의 구조를 기다리는 [배트맨] 시리즈의 로빈도 있었으니까요.

이 다양한 페티시즘과 새도매저키즘의 결합은 종종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인 예는 [어벤저]의 [에픽] 에피소드입니다. 이 에피소드에서 미친 영화 감독은 엠마를 납치해서 스너프 영화를 찍으려 합니다! 당연히 엠마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다양한 함정이 등장하고 그 마지막은 무시무시한 전기톱이 장식하죠. 이게 부족하다면 [바바렐라]에 나오는 오르가즘 기계는 어때요?

4.

'복잡한 함정'의 당위성은 '수다쟁이 악당'보다 떨어지지만 (대부분 악당의 새도매저키즘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인데, 별볼일 없는 목적에 비해 들이는 공이 너무 큽니다) 아직도 꾸준히 사용되고 있습니다. 효과가 크고 변화를 줄 여지도 많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원더우먼]이나 [바이오닉 우먼]을 장식했던 구식 트릭들은 더이상 쓰이지 않습니다. 요새 액션물은 그런 것 없이도 위기일발의 상황을 만들어 낼 정도로 충분히 폭력적입니다. 특수효과의 발달로 위기감 창출의 도구도 늘어났고요. [로이스와 클락]은 그런 구식 트릭을 남발한 시리즈였지만 그 시리즈도 그런 트릭들을 그냥 다루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심각한 척하며 그런 상황을 비꼬고 뒤집었습니다.

그러나 패러디의 영역으로 넘어가면 '복잡한 함정'은 보고나 다름없습니다. 30년대 만화 제작자들은 일찍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요. 톰과 제리나 박스 바니, 로드 러너와 같은 만화 주인공들은 수많은 복잡한 함정들과 싸워야 했지요. 당위성을 전적으로 무시한 그 복잡한 기계들은 그냥 보고 있기만 해도 재미있었습니다.

'복잡한 함정' 클리셰의 미래는 양극단에 놓여있습니다. 새로운 상황 창출로 진부함을 극복하려는 시도는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패러디의 영역 역시 꾸준히 발굴되겠지요. 그러나 그 사이에 놓인 구식 트릭이 부활할 가능성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미 너무 노골적으로 진부해졌거든요. (99/02/11)

D&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