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다스런 죽음

이 클리셰는 우리나라 전쟁 영화에서 특히 많이 찾아볼 수 있지요. 대충 이런 겁니다. 주인공 김상사는 총에 빵 맞아 곧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그냥 죽을 생각을 하지 않고 옆의 박이병에게 "옆집 복순이에게 내가 잘 싸웠다고 전해주게. 어머니에게는 내가..." 로 시작하는 끝도 없이 긴 유언을 늘어놓으며 장엄한 눈물을 흘립니다. 그럼 박이병 옆의 이병장이 또 총에 맞아 죽으며 "앞집 갑순이에게 내가 사랑했다고 전해주게..."로 시작되는 연설을 시작하고요... 영화가 끝날 때 쯤이면 박이병은 우편배달부가 되어 전국을 누벼야 할 판입니다.

놀려대는 건 그만두죠. '수다스런 죽음' 클리셰는 충분히 자주 농담감이 되어 왔습니다. 코미디 소재로도 많이 쓰이고요.

그런데 여러분 중에 이런 전쟁 영화를 직접 보신 분이 얼마나 되시나요?

전 한국 전쟁 영화를 극장에서 본 기억은 없습니다. 하지만 주말 오후에 하던 [배달의 기수]에서 이런 죽음을 참 많이 보았어요. 그런 걸 쭈그리고 앉아 봐야 했으니 당시 텔레비전에는 참 볼 게 없었지요. 어떻게 버텼는지 몰라요.

그 기원이 어디인가 생각해봅니다. 아마 우리나라 코미디언들이 주로 영감을 얻는 것은 이만희 감독의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 아닐까 생각해요. 그 영화 속에서 죽어가는 군인들은 모두 하나씩 장엄한 죽음의 장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긴 연설도요.

요새 젊은 관객들은 [돌아오지 않는 해병]을 그렇게 진지하게 볼 수 없을 겁니다. 그 영화의 구식 전쟁 영화식 설정은 갑갑한 구닥다리처럼 보이고 장엄한 죽음은 코미디언들이 너무 우려먹어서 시작도 하기 전에 코미디처럼 보입니다.

별로 좋은 일이라고 할 수는 없죠.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아주 잘 만든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이 영화를 보는 데 조금 애를 먹긴 하지만 (전 어깨에 힘주고 목소리를 까는 한국식 구식 남자 캐릭터들한테는 도대체 진지해질 수 없습니다!) 이 영화 속의 죽음들이 단순히 실소감은 아니라는 점은 말할 수 있습니다. 코미디언들을 잊고 본다면 그들의 죽음에는 장중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수다스런 죽음은 오페라의 아리아에 가깝습니다. 영화는 꼭 스토리만 이야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어느 순간에서 감정을 노래할 수도 있는 것이죠. 그 순간 시간은 정지하며 주인공은 시인이 됩니다.

한국 영화에만 이런 예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수많은 홍콩 느와르들이 이런 수다스런 죽음을 다루고 있습니다. 많은 헐리웃 영화들도 마찬가지고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톰 행크스의 죽음도 우리나라식 수다스런 죽음에 아주 가깝습니다. 요새 우리나라 감독이 같은 상황을 다루었다면 오히려 그 죽음 장면을 훨씬 짧게 처리했을 겁니다. 한국 전쟁 영화의 긴 연설 클리셰에 말려드는 걸 원치 않았을테니까요.

소위 '한의 문화'라는 걸로 우리의 수다스런 죽음을 특화시킬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전 하기 싫군요. 일단 귀찮고 또 '한'이란 것으로 우리 문화 전체를 몽땅 설명하려는 시도 자체가 싫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은 꽤 잘 먹히는 도구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분들이 한 번 해보시길.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왜 이런 장엄하고 진지한 장면이 그렇게 코믹해졌나를 설명하는 것 뿐입니다. 사실과 어긋나서일까요? 아뇨. 그건 반복이 지나쳤기 때문입니다.

우리식 수다스런 죽음이 [돌아오지 않는 해병] 하나에만 들어있었다면 우린 웃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상상력 부족한 뒷 세대의 선전 영화 감독들이 지나친 영웅화를 위해 이런 수다스런 죽음을 쓸데없이 자주 끌어들였기 때문에 질린 것 뿐이죠. 곧 노골적인 영웅화와 수다스런 죽음은 자연스럽게 엮어들게 되었고 그 결과 애꿎은 [돌아오지 않는 해병]까지 도매금으로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한국식 수다스런 죽음은 우리나라 군사 독재 문화의 창조물이기도 했겠지만 희생자이기도 했습니다. (99/02/21)

DJU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