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을 벗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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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히트한 틴 코미디 [She's All That]은 고등학생 프레디 프린즈 주니어가 내기에서 이기기 위해 미술반의 '너드'인 레이첼 리 쿡을 프롬 퀸으로 만들다가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이죠. 어떻게 너드를 프롬 퀸으로 만드냐고요? 흠, 레이첼 리 쿡의 캐릭터는 안경을 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프린즈 주니어의 캐릭터가 쿡의 캐릭터에게 말하죠. "안경을 벗어봐."

와우!!! :-)

이 장면은 '안경 벗기기 클리셰'의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안경을 벗어봐"라고 말하는 사람이 장래의 애인일 수도, 친구일 수도, 아니면 여자 주인공을 스타로 만들어줄 스타 메이커일 수도 있지만, 설정은 어디서나 같습니다. 안경을 쓰고 있어서 못생긴 줄 알았던 여자가 안경을 벗고나니 절세가인이더라.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시겠죠. 레이첼 리 쿡은 사실 안경을 쓰고 있을 때도 예쁘게 보입니다. 원래 예쁜 사람이니 안경 따위가 장애가 되거나 하지는 않아요. 안경은 그렇게 엄청난 변장도구가 아닙니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는 사정이 다릅니다. 가까운 예로 원더우먼을 보세요. 헤어스타일을 바꾸고 안경을 썼다는 이유 만으로 멍청한 트레버 대령은 다이아나 프린스가 원더우먼이란 걸 끝까지 눈치채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많은 클리셰들이 그런 것처럼 여기에도 안이함이 숨어 있습니다. 일단 관객들이 '안경은 엄청난 변장 도구여서 사람의 얼굴을 엄청나게 바꾼다'라는 것을 받아들이면 모든 게 쉬워집니다. 분장비도 절약되고 주연배우의 얼굴을 망치지 않아도 되며 이야기를 설명하느라 시간을 질질 끌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여기엔 나름대로의 진실이 숨어 있습니다. 하긴 사람은 꾸미기 나름이니까 구질구질한 패션 속에 굉장한 미인이 숨어 있을 수도 있는 법이죠. '안경 벗기기 클리셰'는 그런 미인이 드러나는 과정을 극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는 상징적 수단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안경을 벗어봐'라는 마술 주문은 여러 모로 효과적입니다. 안경은 우선 눈가리개입니다. 그리고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하지 않아요? 게다가 '벗어봐...'라는 말에 숨겨진 에로틱한 의미도 무시할 수 없어요. 코끝에 걸친 테를 떼어냈을 뿐이지만 여자 주인공은 거의 벌거벗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 클리셰는 꽤 여러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 장면의 에로틱한 면을 더 팔 수도 있고 또 성적 파워 게임의 측면에서 볼 수도 있지요. 여성 판타지로도 남성 판타지로도 각각 다른 의미가 있고요. 하지만 저희는 될 수 있는 한 자의적인 해석은 자제하려고 합니다. 그런 건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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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 벗기기' 트릭은 요샌 거의 코미디로 옮겨갔습니다. 진지한 이야기에 쓰기엔 너무 닳아버렸습니다. 아직 신선하다면 저희 리스트에 올라 있을 리가 없죠.

하지만 코미디에서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She's All That]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 영화의 각본은 이중적입니다. '안경 벗기기' 클리셰의 진부함을 반쯤 비웃으면서도 레이첼 리 쿡이 백조로 변신할 때는 또 순수하게 즐기는 거죠.

하긴 이런 게 클리셰의 매력이자 함정입니다. 진부해지는 모든 것에는 원래 강한 매력이 있는 법입니다. 우린 지루한 것을 남용하지는 않습니다. (99/03/16)

D&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