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 호접몽

'사이버 호접몽'은 SF물에 흔히 사용되는 도구 중 하나입니다. 주인공이 지금까지 현실 세계인 줄 알았던 것들이 알고 봤더니 컴퓨터가 만들어낸 가상 현실이라는 것이죠.

이런 영화나 소설의 대부분이 사이버펑크 물이기 때문에 이 도구가 사이버펑크 작가의 발명품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이 도구은 사이버펑크보다 훨씬 오래되었습니다. 사이버펑크 이전의 작가인 필립 K. 딕은 이미 가상현실을 다룬 여러 걸작을 쓴 적 있습니다. 그의 59년작 [Time Out of Joint]는 그 대표적인 예죠. 이 소설의 주인공은 자기가 살고 있는 1950년대가 사실은 미래의 군부가 만들어낸 가상 현실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필립 K. 딕이 이런 소재를 다룬 최초의 사람은 물론 아닙니다. 심지어 SF 이전에도 '삶은 꿈'이라는 소재는 넘치고 넘쳤었습니다. 호접몽은 가장 유명한 예고 우리나라에는 '조신의 꿈'과 같은 게 있죠. 이런 이야기는 세계 어디든지 있습니다. 꼭 동양적인 것이라고 할 수도 없지요.

'사이버 호접몽'을 이용했다고 해서 그 작품이 모두 진부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그걸 진부하게 이용할 때만 작품이 진부해지는 것이죠.

순진하게 '이 모든 것이 가상현실이었어!'를 오 헨리식 반전으로 사용하는 작가가 있다면 그는 장르 독자들의 야유를 받을 겁니다. 그런 트릭은 이미 오래 전에 유효기간이 끝났습니다. 하지만 '사이버 호접몽'을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가상현실은 다양한 형이상학적 가제트를 동원할 수 있는 배경이 될 수 있고 순수한 액션의 공간으로도 쓰일 수 있습니다. 문은 열려 있습니다. 작가가 머리만 쓴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진부해지지 않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특히 장르 밖 작가들은 이런 소재를 아주 만만하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결과는 대부분 유명한 이름을 건 진부한 작품으로 끝나고 맙니다만.

더 지겨운 것은 장르 밖 평론가들의 진부함입니다. 대충 이런 내용을 영화 몇 편으로 때운 이 양반들은 잽싸게 호접몽이나 불교 인식론과 이런 이야기의 연관성을 보고 마치 새로운 것을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떠들어댑니다.

편리한 구분법이 만들어집니다. 사이버펑크 영화를 평하는 비평자가 '호접몽'에 대한 언급을 한 문장 이상 한다면, 여러분은 그 평론가가 그 장르나 개별 영화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확신해도 됩니다. (99/05/19)

DJU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