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21세기의 공식적인 시작은 언제일까요? 기원 1년부터 꼬박꼬박 센다면 2001년 1월 1일이겠지요. 하지만 옛날 사람들과는 달리 0이란 것이 있다는 걸 아는 현대인들은 2001년의 시작을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아무래도 뭔가 어색해요.

따지고 보면 기원 1년이 정말로 예수 탄생년인 것도 아니니 2000년을 21세기의 시작으로 받아들여도 상관없을 겁니다. 전문가들이 아무리 뭐라고 떠들어도 이미 우리는 심정적으로 21세기에 살고 있습니다. 새 밀레니엄을 맞이하는 저 요란한 축제들을 보세요.

그러고보니 기분이 묘해집니다. 다들 21세기는 뭔가 대단한 시대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화성행 유인 우주선, 가정용 로봇, 외계인과 조우... 유감스럽게도 이들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실용화된 것은 없습니다만.

이런 생각들의 원흉은 SF 소설과 영화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독자들의 '현재'와 그들이 만들어낸 '미래' 사이에 경계를 세우기 위해 21세기를 이용했습니다. 20..으로 시작하는 숫자를 앞에 세우기만 해도 뭔가 새로운 시대처럼 보였습니다. 기껏해야 몇 십 년 뒤인데 말이에요.

물론 우리가 정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우주선이나 로봇은 없지만, 우린 SF 작가들이 상상도 못했던 다양한 성과를 거두어냈습니다. 예를 들어 아무도 퍼스널 컴퓨터나 인터넷을 상상해내지 못했으니까요. 그네들이 꿈꾸었던 21세기는 우리보다 더 발전된 세계가 아니라 우리와 다른 식으로 발전한 20세기식 세계였던 셈입니다.

이제는 그런 트릭을 쓰기 힘들어졌습니다. 이미 21세기니까요. '21세기'의 미래형 느낌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22세기'가 21세기가 지금까지 누려왔던 미래의 역할을 대신할 것도 아니고요. 아무래도 느낌이 약하거든요. 우리는 새로운 세기에 접어들었지만 그와 동시에 오랫동안 상상력의 터전이었던 가상의 시대를 잃어버렸습니다. 아쉬움과 함께 작별인사를 보내보죠. '잘가라, 21세기!' (00/01/02)

DJU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