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한 옷 입고 기절한 여자들

1.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처음으로 본 친구 하나가 그러더군요. "좋은 영화였어, 그런데 왜 포스터에 나오는 장면은 없지? 나오면 감동하려고 기다렸는데 끝까지 안 나오잖아."

포스터가 어땠는지 기억나세요? 클락 게이블이 아틀란타 화재를 배경삼아 기절한 비비안 리를 팔에 안고 막 키스에 돌입하려는 듯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지요. 기절한 비비안 리는 가슴이 반쯤 드러난 상당히 야한 옷을 입고 있었고요.

이런 장면이 정말 안 나오는 걸까? 네, 안 나오는 거 맞아요. 백번 뒤져 보세요. 그런 장면이 나오나. 게이블이 리를 안고 계단을 (힘겹게) 오르는 장면이 한 번 있고 리가 기절하는 장면이 하나 있기는 한데 둘이 결합된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왜 나오지도 않은 장면을 포스터에 삽입했던 걸까요?

말하려는 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이런 포스터의 유일한 예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말 수많은 영화 포스터들이 찢어진 네글리제를 입은 젊은 여자들이 기절한 채 악당이나 주인공이나 괴물의 팔에 안겨 축 늘어진 모습을 비주얼로 삼았지요. 그 중 상당수는 그런 장면이 나오지도 않았고 영화 줄거리와 맞지도 않았습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당위성이라도 있었지요. 게이블과 리는 연인으로 나왔었고 배경 또한 험악했으니 그런 장면이 나올 가능성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금단의 행성]을 보세요. 왜 로비가 기절한 앤 프랜시스를 안고 있는 걸까요? 로비는 괴물도 아니고 로맨틱한 주인공도 아닌데 말입니다. 물론 앤 프랜시스는 영화 도중 기절 따위는 하지도 않습니다. (나중에 보니 그 여자는 앤 프랜시스도 아니더군요!)

2.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여자들은 아주 쉽게 기절했습니다. 디즈니 버전 [미녀와 야수]와 장 콕토 버전 [미녀와 야수]를 보세요. 디즈니 버전의 벨은 겁이 나면서도 용감하게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지만, 장 콕토 버전의 벨은 괴물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꺾인 꽃처럼 픽 까무라쳐 버립니다. 정말 많은 호러 영화의 여자 주인공들이 이런 식으로 기절했어요. 요새 배우들은 이들처럼 잘 기절하지는 못할 겁니다. 예전과는 달리 툭하면 기절하는 버릇은 여성의 생존 수단이 아니거든요. 익숙할 리가 없죠.

이런 기절이 생존 수단으로 쓰일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당사자의 여성적 나약함을 극도로 과장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여성성의 과장은 당연히 에로티시즘으로 이어지고요. 그렇다면 이런 여성성과 대비시켜야 하는 남성은 어떤 모습을 취하고 있어야 할까요? 반대로 강하고 크고 억센 모습이어야 할 겁니다. 이 둘을 결합하는데 가장 쉬운 방법은 아까 기절한 여자 주인공을 안아 들게 하는 것이겠죠.

아, 그런데 이게 보기만큼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실제로 여자 주인공을 안고 뛰는 남자 주인공을 영화 속에서 그렇게 자주 보지는 못했을 거예요. 사실 포스터에서 나온 것처럼 멋있게 포즈를 취하려면 여자는 아주 작아야 하고 남자는 아주 커야 합니다. 아무리 적어도 30센티미터 정도의 차이는 나야 해요. 괴물들이야 덩치 큰 스턴트맨이 하면 되니까 상관 없지만 실제로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키 차이가 이렇게 크게 나기는 힘들죠. 제가 지금 당장 기억해낼 수 있는 기절한 여자를 안은 남자 이미지는 [녹색의 장원]에 나오는 오드리 헵번과 안소니 퍼킨즈의 모습입니다. 퍼킨즈는 꽤 키가 큰 편이지만 그래도 그가 기절한 헵번을 안고 뛰는 모습은 참 어설퍼보였습니다. 헵번은 결코 무거운 사람이 아니었겠지만 키가 커서 균형이 제대로 잡혀 보이지 않았던 거죠.

그렇다면 야한 옷 입고 기절한 여자를 안고 뛰는 남자의 이미지는 생각만큼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건 그냥 키 차이를 조작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전체적인 골격 크기를 조작해야 하니까요. 대부분 사람들은 포기하고 말 겁니다.

그래도 이미지 자체는 포기하기가 아깝습니다. 그렇다면 대안은? 포스터에 써먹는 거죠. 옛날 영화들이 그처럼 기절한 여자들을 남용한 것도 이해가 가죠? (00/05/29)

DJU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