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인 지구 침공

1.

80년대에 히트했던 [V]라는 텔레비전 미니 시리즈가 있었죠. 도마뱀처럼 생긴 파충류 외계인들이 비행접시를 타고 와서 지구를 정복하려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문제는 왜 외계인들이 그 먼 거리를 날아와서 지구를 정복하려고 했느냐는 것입니다. 제가 기억하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 동네엔 물이 모자라서 지구에 많은 물을 훔쳐가려고 했다는 게 가장 중요한 이유였어요. 그리고 그 친구들은 사람 고기도 좀 먹고 싶었나 봅니다.

둘 다 어처구니 없는 이유였죠. 물 같은 건 그 먼 거리를 날아오지 않아도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어요. 수소나 산소는 우주에서 가장 흔한 것들이니 말입니다. 그 정도로 발달한 우주선을 만들 수 있는 실력이 있는 종족이라면 물 같은 걸 구하기 위해 자기 행성을 떠날 필요도 없을 겁니다. 정 궁하더라도 같은 태양계 안에서 구할 수 있었겠죠. 사람 고기? 그 정도로 과학이 발달한 종족이 외계에서 고기를 구해와야 할 정도로 식량난에 시달린단 말입니까?

따지고 보면 외계인이 지구를 침략해야 할 이유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우주전쟁은 경제적으로 고려해보면 늘 타산이 안 맞거든요. [배틀필드]에서는 광산 때문이었는데, 그런 거야 지성체가 사는 행성을 침략하지 않고서도 구할 수 있죠. 식민지? 식민지는 지구에서도 그렇게 채산이 맞는 사업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우주에는 지성체가 사는 행성보다야 빈 행성이 더 많지 많겠습니까? 다시 말해 항성간 여행을 할 정도로 발달한 과학을 가진 종족들은 우리가 전쟁의 이유로 삼는 문제거리들을 다른 방식으로도 쉽게 해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럴싸한 핑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스타 트렉]의 보그 족들은 자기 본능을 따르는 것이니 그들의 지구 정복 욕구는 당연합니다. [프레데터]의 외계인들은 스포츠하러 온 모양인데, 하긴 똑똑한 종족들은 취미 생활을 위해 별 괴상한 짓을 다 하기 마련이니 이해해줄 수도 있죠.

하지만 외계인이 지구를 정복하러 오는 영화들의 대부분은 그럴싸한 이유를 제공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죠. 외계인들은 사실 진짜 외계인들이라기보다는 지구인들의 모습을 변형시키고 확장한 것에 불과하니까요.

2.

외계인 지구 침공 이야기를 더 까다롭게 만드는 것은 기술적인 격차입니다. 사실 발달한 외계인과 지구인 사이에서는 제대로 된 전쟁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비슷한 상대가 되어야 전쟁이 가능하죠. 유럽인들과 신대륙 원주민들 사이에 벌어진 일방적인 전쟁을 생각해보세요. 항성간 여행을 할 정도로 발달한 외계인들과 지구인의 기술 격차는 그것보다 훨씬 클 겁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외계인 지구 침공 이야기에서는 그런 기술 격차를 무시하는 듯 합니다. [배틀필드]나 [인디펜던스 데이]에서 지구 전투기는 외계인 우주선과 거의 맞먹습니다. 다른 해결책도 어처구니가 없기 짝이 없죠. [V]에서는 해결책이 생물학 병기인데, 다른 별을 침공하는 외계인들이 가장 먼저 신경을 쓰는 것이 바로 미생물에 의한 감염이 아닐까요? (그런 걸 생각하면 허버트 조지 웰즈의 고전 [우주 전쟁]도 이치에 닿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무대를 미래로 하면 사정은 좀 나아집니다. [스타 트렉]의 지구인들은 외계인들과 비슷한 기술 수준을 가지고 있으니까 전쟁은 말이 되지요. 하지만 이 친구들이 상대하는 외계인들이 다 비슷한 수준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요? 역시 이상한 건 마찬가지입니다.

3.

외계인 지구 침공 이야기는 계속 만들어질까요? 아마 진짜 외계인들이 지구를 찾아오기 전까지는 그럴 겁니다. 하지만 예전처럼 솔직하고 진지한 방식으로 이 소재를 다루는 건 힘들 거예요. [인디펜던스 데이]처럼 뻔뻔스런 복고주의로 나가거나 [화성 침공]처럼 노골적인 야유를 퍼붓는 편이 더 잘 먹히겠죠. [엑스 파일]도 비교적 잘 하고 있지만, 그건 외계인들의 정체를 분명하게 밝히지 않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00/07/09)

DJU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