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울한 미래

핵전쟁으로 멸망한 지구, 외계인에 의해 노예화된 지구, 원인불명의 바이러스로 전세계인들이 흡혈귀나 좀비가 된 지구, 지나치게 발달한 기계 문명에 의해 점점 사람들이 왜소화되어 가는 지구... 이런 것들이 SF 영화나 소설이 다룬 암담한 미래들이죠. 요새는 이런 시꺼먼 미래들이 [스타 트렉]의 건전한 미래들을 밀어내는 듯 합니다. 사실 [스타 트렉] 시리즈도 세월이 가면 갈수록 어두워지는 듯한 느낌이에요. [딥 스페이스 나인]이나 [보이저]는 오리지널 [스타 트렉]보다 훨씬 어두운 시리즈입니다.

언제부터 밝고 건전한 기술 문명이 이런 어두컴컴한 미래에 자리를 내주었을까요? 정확한 시점을 말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컴컴한 미래와 밝은 미래는 늘 공존해왔으니까요. 그리고 밝기만 한 미래 이야기는 애당초부터 없었죠. 그런 걸로는 이야기를 만들 수가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이유는? 뭐, 거창한 이유는 있습니다. 과학 문명에 대한 낙관적인 믿음은 20세기에 와서 서서히 시들어갔으니까요. 환경 오염이나 핵전쟁의 위협같은 것들이 드러나면서 사람들은 점점 이 거대한 과학 문명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죠. 결코 미래가 자가용 우주선으로 화성이나 금성에 바캉스를 떠나는 식으로 흘러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 겁니다.

그러나 이런 거창한 이유는 핑계에 불과합니다. 진짜 이유가 둘 더 있죠.

첫째로, 암담한 미래는 싸게 먹힙니다. 암담한 미래가 그렇게 많이 쏟아진 이유는 생각해보면 간단해요. 돈이 별로 없는 B급 영화 제작자들이 핵전쟁 이후 이야기를 무더기로 만들었으니까요. 지구가 망했다니 세트가 필요있나요, 우주선 특수 효과가 필요있나요. 그냥 땀투성이 근육질 남자들이랑 가슴 큰 여자들에게 야한 옷을 입혀놓고 미래의 투사라고 우기면 됩니다.

두번째 이유는 약간 더 복잡합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게 그거죠. 암담한 미래는 더 '쿨'해 보입니다. 건전한 미래는 너무 교과서적이고 위선적으로 보이잖아요. 컴컴한 미래는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과 더 잘 들어맞고 우리의 리비도를 훨씬 잘 풀어놓습니다. 그건 문명 비판과 별 상관 없는 거죠. 적어도 [블레이드 런너]에 혹한 팬들의 대부분은 영화가 주는 메시지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을 겁니다. (00/07/10)

DJU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