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심하게"

상황. 수백명의 테러리스트들이 빌딩을 점거하고 있고 우리의 주인공은 권총 하나에만 의지한채 홀로 건물에 잠입해야 할 참입니다. 주인공의 보스는 "아무도 널 도와줄 수는 없다. 테러리스트들은 15분만에 몽땅 죽어야 한다. 인질이 털끝 하나라도 다치기만 하면 넌 모가지다." 따위의 뻔한 소리를 늘어놓고 주인공을 내보냅니다. 주인공이 막 나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그 양반이 그를 불러세우죠. 또 잔소리를 하려니 하면서 뒤를 돌아보는 주인공. 그러나 보스가 하는 말은 뜻밖에 자상합니다. "조심하게."

대부분 액션 영화를 보면 "조심하게"라는 대사는 늘 비슷비슷한 리듬을 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열정적인 정치적 연설이나 냉정한 사건 분석이 이어진 뒤, 주인공이나 관객들이 모두 이제 끝났으려니 하는 틈을 타서 수줍게 살짝 따라 붙는 것이지요.

왜 '조심하게'라는 말은 늘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것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건 사적인 감정 표출이기 때문에 중요한 업무 뒤에 나와야 하죠. 보스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정보 제공이나 연설입니다. 그게 주인공의 생명을 구할 수도 있으니까요. '조심하게'는 해도 좋지만 안해도 특별히 나쁠 것은 없는 말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말 뒤에 따라 붙는 건 당연하죠.

하지만 왜 그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요? 왜 연설 뒤에 '그럼 조심하게'라고 말하지 않는 걸까요?

그건 나중에 조심스럽게 말하는 것이 더 감정 표출에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애인이나 부모가 '조심해라'라고 말한다면 그건 별다른 감흥이 없습니다. 당연한 것이니까요. '조심해라'라는 말에 담긴 감정이 효과를 발휘하려면 엉뚱한 사람한테서 나오는 게 더 좋죠. 성마른 직장 동료나 보스가 업무 관련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뒤에 살짝 '조심하게'를 덧붙인다면 앞의 이야기와 대비되어 훨씬 효과가 좋겠지요. 사실 감정은 모순되는 표현 속에 가려져 있다가 살짝 드러나는 편이 그대로 노출되는 것보다 더 효과적입니다.

하지만 저한테는 이게 슬슬 진부해보이기 시작합니다. 리듬만으로도 "조심하게"라는 말이 언제 나올지 짐작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아직도 놀리는 분위기 없이 잘 쓰이는 걸 보면 작가들은 이 트릭이 그렇게까지 진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에요. (00/07/29)

DJU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