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이팬 무기

대충 낡아빠진 무성 영화 장면을 하나 생각하세요. 여자 주인공이 홀로 앉아 있는데 덩치 큰 악당이 여자 주인공을 추근거리기 시작합니다. 그 때 남자 주인공이 짠 하고 나타나서 악당과 싸우기 시작해요. 하지만 악당이 생각보다 힘이 세서 남자 주인공은 그만 악당 밑에 깔리고 말죠. 그러다 갑자기 꽝하는 소리가 나고 덩치 큰 악당은 픽 쓰러집니다. 뒤에서 여자 주인공이 프라이팬으로 악당 머리를 후려갈겼던 거죠.

세부사항은 조금씩 다르지만 기본 아이디어는 같습니다. 악당이 뒤를 돌아보고 있는 동안 여자 주인공이 방심한 악당의 뒤통수를 프라이팬으로 내려치는 거예요.

왜 프라이팬이고, 왜 꼭 뒤통수일까요?

우선 실용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프라이팬은 부엌에 있는 물건들 중 가장 쉽게 무기로 선택할 수 있는 물건입니다. 다루기 쉬운 손잡이가 달려 있는 묵직한 둔기지요. 악당에게 솥 같은 걸 집어던지는 것보다는 프라이팬을 휘두르는 게 더 쉽습니다. 식칼이 있지 않냐고요? 하지만 우리의 여자 주인공은 악당에게도 그렇게 심한 짓은 하지 않습니다.

왜 뒤통수일까요? 그거야 아무리 프라이팬으로 무장했다고 해도 덩치 큰 악당과 정면으로 대결하는 건 무리니까요. 물론 뒤통수를 치는 일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그런 일을 허용할 만큼 절박한 일이 앞에서 벌어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 당연한 상황에는 몇몇 미묘한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프라이팬은 부엌에 속해 있으므로 여성의 무기입니다. 이건 주인공이 이런 폭력적인 상황에서도 여성성을 잃지 않는다는 걸 말하고 있죠.

조금 심하게 말하자면 이건 일종의 변명입니다. 여자 주인공에게 어쩔 수 없이 남성적인 폭력을 허용하면서 그게 그렇게까지 남성들에게 위협적인 것이 아니라고 안심을 시키는 것이죠. 딱하기는... (01/02/27)

DJU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