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식 악센트

자, 상황은 이렇습니다. 영국이라는 작은 나라에 수많은 정복자들이 번갈아 침략해와 토착어를 때려잡는 동안 '영어'라는 언어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라는 신대륙으로 날아가 식민지를 세웠습니다. 식민자들은 18세기 말쯤에 독립해서 미국이라는 커다란 나라를 세웠고요. 미국은 지난 몇 백년 동안 꾸준히 성장해서 세계 제1의 강국이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재미있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원래 영국의 전유물이었던 영어가 세상이 미국 중심으로 흐르면서 슬쩍 미국으로 넘어가 버렸던 것이죠. 우리도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학교에서 영국식 영어를 가르쳤지만 지금은 미국식 영어를 배우잖아요. 언어의 발생지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영국식 영어의 입지는 초라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미국식 영어는 아직 어립니다. 분화된 지 200여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요. 분명한 '미국식 영어'가 만들어진 건 그보다 훨씬 뒤의 일이고요. 20세기에 와서도 영국식 악센트는 여전히 고상한 사람들이 쓰는 말투였습니다. [비는 사랑을 타고]를 보면 유성 영화 시대가 되자 발성법 교사들이 배우들에게 과장된 영국식 영어로 말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장면이 나오죠. 정말 당시엔 그랬었습니다. 그 영향이 꽤 오랫동안 남기도 했답니다. [카사블랑카]와 같은 구식 영화에 나오는 클래식 할리우드 배우들이 쓰는 정형화된 대사에는 약간 영국식 악센트가 섞여 있어요. 영국식으로 멋을 부린 미국식 영어라고 할까요.

이런 식의 컴플렉스는 엉뚱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에버 애프터]나 [전쟁과 평화], [노스트라다무스]처럼 할리우드 배우들이 과거의 비영어권 외국인인 척 하는 사극에서는 배우들이 모두 영국식 영어를 쓴다는 이상한 전통이 생겼던 것이죠.

왜 프랑스나 러시아가 무대인데 프랑스 악센트나 러시아 악센트를 쓰지 않느냐고요? 물론 쓸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악센트를 밀어붙이다보면 관객들이 집중할 수 없게 됩니다. 제대로 된 영어를 쓰는 게 가장 좋죠. 하지만 [에버 애프터]의 무대가 된 르네상스 시대의 프랑스에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미국식 영어를 쓰는 건 시대착오적이 아닐까요? :-)

어처구니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으실 겁니다. 아직도 많은 관객들은 왜 프랑스인인척 하는 미국 배우들이 일부러 영국식 악센트로 발음을 하는 지 궁금해하고요. 그러나 전 대충 논리가 맞는 것 같습니다. 호사스러운 르네상스 시대의 옷을 입고 미국식 영어로 이야기하는 모습은 아무래도 어색할 거예요. (02/01/04)

DJU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