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정집

풋내기 SF작가들이나 판타지 작가들이 저지르는 가장 뻔한 실수 중 하나는 자기만의 우주를 창조해내는 작업이 뭔가 굉장히 대단한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건 정말 따분한 착각입니다. 세상에 그것처럼 쉬운 건 없죠. 여러분도 아무런 준비없이 지금 당장할 수 있습니다. "알로브라카라프출이라는 행성에 오롤라부하라는 나라와 블로하나바스라는 나라가 전쟁 중이었다. 오롤라부하의 왕인 브루콜롤티차는 일곱 개의 머리를 가진..." 물론 장편 소설을 쓰려면 그보다 조금 더 복잡한 작업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런 건 대부분 20세기 초의 상하이처럼 실제로 존재했던 세계를 재창조하는 것보다 훨씬 쉽고 공도 덜 듭니다.

이런 가짜 세계 중에서도 잘 만들어진 세계가 있고 못 만들어진 세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한가지는 분명합니다. 독창적인 설정을 만들고 그것들을 제대로 운영해낼 줄 아는 사람들은 자기만의 우주를 만든다는 행동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않을 정도로 똑똑하다는 거죠. 이걸 반대로 이야기한다면, 시작부터 요란하게 자기가 만든 우주를 광고해대는 사람들은 대부분 별 실속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핑계가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반지의 제왕]의 각색자들은 영화 도입부에 미들 어스의 역사를 설명하는 긴 설정 소개를 넣었습니다. 원작자 톨킨은 이런 것 없이도 이야기를 진행시킬 줄 알았지만 영화에서는 넣어주는 게 좋았죠. 책 하나 분량의 이야기가 영화 앞에 놓여 있었으니 말이에요.

하지만 자기네들이 만든 우주가 너무나도 복잡해서 관객들이 따라가지 못할 거라고 걱정하며 작가들이 삽입하는 프롤로그는 대부분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언더월드]를 보세요. 늑대인간과 뱀파이어의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는 셀린의 프롤로그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입니다. 그런 것 없이도 관객들은 10분안에 모든 설정을 꿰뚫어보기 마련이죠. 도대체 이해 못할 게 뭐가 있어요? 영화가 시작되자 마자 늑대인간들과 뱀파이어들이 으르렁거리며 싸우는 게 눈에 보이는데 말이에요. [이퀄리브리엄] 역시 마찬가지. 앞에서 자상하게 설정을 소개해주지 않아도 그 세계가 감정이 통제되는 디스토피아고 그들이 가끔 자기에게 주사하는 프로지움이 감정을 억제하는 약물이라는 건 몇 분만 지나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설명을 넣어야 합니다.

설정집 프롤로그보다 더 따분한 건 진짜 설정집입니다. 이런 것들을 특정 텔레비전 시리즈나 영화 시리즈의 팬들이나 비평가들이 만든다면 재미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시리즈를 만든 사람들이 직접 자기 우주의 설정집을 공개한다면 그 결과는 종종 그냥 우스꽝스럽기만 하죠. (03/09/17)

DJU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