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된 악당

[원더우먼] 1시즌 에피소드인 'Wonder Woman Meets Baroness Paula Von Gunther'에서 원더우먼은 납치된 스티브 트레버를 구출하기 위해 스파이의 저택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편안한 가운을 입은 스파이가 걸어오더니 이러죠. "기다리고 있었소, 원더우먼." 그러자마자 뒤에서 또다른 스파이가 마취약이 든 스프레이를 원더우먼의 얼굴에 뿌려 그녀를 잠재웁니다.

시퀀스의 결말은 조금씩 다를 지 몰라도, 기본 형식은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주인공이 온갖 자잘한 단서들을 모아 악당의 정체를 알아내거나 부하들을 수십 명씩 해치운 뒤 악당 두목을 잡으러 갑니다. 하지만 이 악당은 이미 오래 전에 준비를 딱 하고 주인공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기다리고 있었소, 원더우먼/미스터 본드/닥터 존스/배트맨/수퍼맨..." 이런 악당들은 시리즈물에 특히 많은데, 그래야 뒤에 이름을 붙이는 게 더 근사하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준비된 악당'이 이렇게 많이 등장하는 건 일단 이게 액션 영화의 리듬에 맞기 때문입니다. 언제까지 주인공들이 악당들을 물리치며 상승만 할 수는 없지요. 완만하고 변화 없는 상승직선은 변화가 없는 것만큼이나 재미가 없습니다. 클라이막스에 오르기 전에 약간의 휴지기를 주고 그 상황에서 갈등을 폭발 시켜야 하는 겁니다.

이런 설정은 악당들의 수준을 높여주기도 합니다. '기다리고 있었소' 악당은 여러 모로 주인공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습니다. 주인공의 행동을 예측하고 있을만큼 똑똑하고 대결에서 승리할 만한 힘과 기술도 보유하고 있는 거죠. 한 마디로 싸울만한 가치가 있는 겁니다.

이 클리셰는 자연스럽게 다른 클리셰로 연결되기도 합니다. 위의 [원더우먼] 에피소드는 '복잡한 함정' 클리셰와 '수다쟁이 악당' 클리셰 모두와 연결되지요. 하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똑같은 소리만 하는 악당들이 다른 클리셰에 빠지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 있을까요? (06/01/23)

DJU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