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통로, 비밀공간

비밀통로와 비밀공간은 영화 시대의 클리셰가 아닙니다. 기원만 따진다면 훨씬 오래 되었죠. 이 도구의 전성기는 고딕 소설과 로맨티시즘이 유행이던 19세기 전후였습니다. 아르센 뤼팽 소설만 봐도 툭하면 비밀 입구로 감추어진 비밀의 방이나 비밀통로가 나오잖아요.

이 설정은 생각하기 귀찮은 대중문학가의 환상이 아니었습니다. 뤼팽 소설에서처럼 편리하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유럽에서 지어진 많은 옛 건물들이 비밀통로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게 한동안 유행인 적도 있었어요. 안전을 위해서이기도 했고 그냥 멋있어서 그러기도 했죠.

하지만 영화의 시대가 오기도 전에 비밀통로는 구닥다리 클리셰가 되었습니다. 특히 추리소설에서는요. 당연하지 않겠어요? 근사한 밀실 살인이 일어났는데, 정답이 "비밀통로가 있었다"이면 얼마나 실망스럽겠어요? 진짜 괜찮은 퍼즐 미스터리를 만들려면 비밀통로나 비밀의 방은 처음부터 추방해야 합니다. 게다가 그러는 동안 건축법은 강화되었고 사람들은 유지비만 비싼 대저택이나 성을 떠나 보다 작고 안락한 현대식 아파트나 건물로 이사했습니다. 비밀통로가 등장할 기회는 점점 사라져만 갔습니다.

그러나 아주 사라진 건 아니었습니다. 고딕 소설의 비밀통로가 가진 로맨틱한 느낌은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다양한 변종들이 남아 있어요.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현대 건축물을 무대로 한 스릴러에서 자주 쓰이는 환기용 닥트입니다. 잘 눈에 뜨이지는 않지만 건물 곳곳과 연결되어 어디로든 갈 수 있으니, 일종의 현대판 비밀통로인 셈이죠. 또다른 현대적 변형은 컴퓨터 네트워크입니다. 사람의 몸이 직접 드나들 수 있는 물리적 통로는 아니지만, 해킹 과정을 통해 비밀통로와 거의 같은 역할을 하는 연결선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작정하고 비밀통로와 비밀공간의 구닥다리 느낌을 밀어붙이는 작품들도 있습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건 역시 [덱스터의 실험실]이겠죠. 분명 이층에 있는 덱스터의 침실과 지하에 있는 비밀 실험실을 연결하는 통로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지만. (06/05/23)

DJU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