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마의 클리핑

'살인마의 클리핑'은 주로 미치광이 범죄자들을 소재로 한 할리우드 영화에 쓰입니다. 우리의 주인공 형사가 마침내 위험하기 짝이 없는 미치광이 범죄자의 아지트를 알아냅니다. 그곳은 십중팔구 배수가 형편없고 볕도 잘 안 드는 컴컴하고 냄새나는 아파트죠. 주인공이 불을 켜는 대신 회중전등을 들고 안으로 들어오면 엄청난 작품이 그를 맞이합니다. 지금까지 살인마가 진행하거나 계획하고 있던 모든 범죄들을 설명하고 다음 범행을 예고하는 엄청난 양의 신문기사나 사진들이 한쪽 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죠. 그 순간 주인공은 허겁지겁 휴대전화를 들고 경찰이나 상사에게 연락합니다. 범죄자는 다음 어느 곳에 있고 무슨 범행을 저지르려 한다고요.

내용상 몇가지 변주가 존재하지만 기본 구조는 거의 같습니다. 영화 속의 범죄자는 컴퓨터나 노트에 꼼꼼하게 자신의 계획을 기록하는 대신 벽 전체를 캔버스 삼은 거대한 콜라주 작품을 만드는 걸 더 좋아합니다. 누가 들어와서 그걸 구경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전혀 안하는 것 같아요. 물론 정말 그렇게 누군가가 들어와서 본다면 그 사람은 죽은 목숨이겠죠. 주인공이 아니라면요. 조금 더 영리한 범죄자라면 이걸 오히려 도구로 사용할 수 있겠군요. 정성껏 만든 가짜 클리핑을 전시해 형사들을 엉뚱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거죠.

왜 이 사람들은 들킬지도 모르는 걸 알면서 이처럼 거대한 작품에 매달리는 걸까요? 그거야 그게 더 그림이 되니까요. 영화는 기본적으로 시각적인 매체입니다. 논리보다 구경거리를 더 좋아하죠. 그리고 '살인마의 클리핑'은 잘만 꾸민다면 근사한 구경거리이며 영화적 장치입니다. 구차스럽게 주인공이나 살인마에게 강연을 시키는 대신 클리핑 위로 카메라만 죽죽 그어도 이야기가 설명되는 걸요. 더 좋은 건 주인공이 추론과정 중 체험하는 에피파니의 경험을 관객들과 공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 예라... 얼마 전에 개봉되었던 한국 호러 영화 [스승의 은혜]에서 거의 모범적인 '살인마의 클리핑'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장면은 이 영화가 결말을 도용한 모 할리우드 영화에서 사용된 것인데, 사실 오리지널 쪽이 그 도구를 더 창의적으로 사용했습니다. 모범생처럼 공식을 따라한 [스승의 은혜]와는 달리 그 영화에서는 공식적인 클리핑 자체를 지워버리고 사방에 흩어진 물건들을 조합해 에피파니에 도달하는 과정만을 보여주었거든요. (06/10/06)

DJU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