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연민을 속죄라고 착각하는 남자들

제가 KBS 미니 시리즈 [마왕]에 쉽게 몰입하지 못하는 건 주인공 강오수 형사의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상황이 애매하고 그가 그 동안 열심히 살았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한 사람을 죽였고 한 가정을 파괴했으며 그와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의 망가진 인생에 책임이 있습니다. 그 사실은 절대로 바뀌지 않아요.

겉보기에 그는 죄책감에 차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그렇게 설득력이 없어요. 그는 세상 고민을 다 짊어진 것처럼 고함을 질러대다가도 자신이 괴롭혔던 옛 동창을 만나면 성인군자라도 되는 것처럼 설교를 늘어놓습니다. 그 친구 입장에선 재수없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죠. 아무리 그가 하는 말이 진실에 가깝다고 해도요.

강오수를 움직이는 건 죄책감이 아니라 자기연민입니다. 물론 죄책감에 기반을 둔 자기연민이죠. 하지만 결과는 같습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고통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요. 그 때문에 외부로 드러나는 고통이 더 큰 겁니다.

이런 캐릭터들은 꽤 많습니다. 가장 유명한 건 [버피] 시리즈의 앤젤과 스파이크겠죠. 둘 다 지은 죄 때문에 고생이 많은 친구들인데, 문제는 이들이 그 죄책감을 폼나는 가죽 재킷처럼 과시용으로 입고 다녔다는 데 있습니다. 그 중 [버피] 후반 시즌의 스파이크는 너무 심했죠. 앤젤은 조금 나았지만 (세상에, 스파이크와 비교해서 앤젤이 나았다는 말이 나올 줄은 미처 몰랐네요) 여전히 그는 자신의 고통을 자신의 죄보다 중요시 여겼습니다.

물론 이들은 모두 결점있는 친구들입니다. 자기연민을 속죄라고 착각하는 것도 그런 단점들 중 하나죠.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작가가 이 둘을 구분하는 건 중요합니다. 결국 세상과 시청자들과 관객들에게 중요한 건 태도와 결과이니 말입니다.

좋은 예가 필요하다고요? 죄책감의 왕인 장 발장은 어떻습니까?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고통을 오페라 디바처럼 과시한 적 없습니다. 그 고통을 몽땅 속에 묻어두고 자신은 말 없이 속죄의 길을 걸었지요. 장 발장과 같은 성자가 되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멀리서 보고 흉내 정도는 낼 수 있겠죠. (07/05/09)

DJU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