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

지금은 거의 죽어가고 있는 영화 클리셰가 있는데, 영화에 나오는 화장실은 배변과 배설의 용도로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화 속의 사람들은 숨겨놓은 무기를 꺼내기 위해, 서류나 종이를 없애기 위해, 적을 피해 탈출하기 위해, 물을 틀어놓고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누기 위해 화장실에 들어오지만 정작 변기를 원래 용도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은 더 이상 통용이 되지 않습니다. 더 이상 화장실과 관련된 신체현상은 금기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지금은 니콜 키드먼과 같은 할리우드 스타가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는 걸 구경하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요새 화장실 농담은 당연한 할리우드의 코미디 도구로 자리잡았죠.

비교해본다면 집의 화장실보다 공중 화장실이 훨씬 많이 나오고 화장실과 관련된 행위 역시 훨씬 직접적으로 보여진다는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그건 공중 화장실에서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더 무력하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어 가정 화장실에서 휴지가 떨어지는 건 재난이 아닙니다. 하지만 공중화장실은 사정이 다르죠. 그리고 공중화장실은 대부분 훨씬 직설적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공중화장실에 볼일을 보러 가고 영화 속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습니다.

성별에 따라 화장실의 의미도 달라집니다. 남자들의 경우 공중 화장실은 폭력적이고 위험한 곳입니다. 변기는 물고문의 도구가 되고 불쾌한 타자를 만나 구타나 성희롱을 당할 수 있지요. 하지만 여자들의 경우 화장실은 사교의 공간입니다. 여전히 위험한 공간일 수 있지만 물리적 폭력의 무대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지요.

화장실은 공포물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문화에 따라 성격이 다르죠. 서구 영화에서 화장실이 [싸이코]나 [카피캣]에서처럼 연쇄살인의 무대라면 동양 영화에서 화장실은 유령들이 나오는 공간입니다. 이는 문화적인 차이이기도 하지만 현대식 건물에서 재래식 화장실이 수세식으로 바뀌는 속도와도 관련있을 겁니다. (08/10/11)

DJU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