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주 후 기억상실

곧장 말하면 술을 진창 마시고 필름이 끊겼다는 것이죠. 제가 이해할 수 없는 인간행동입니다. 정말 그렇게까지 몸을 험하게 굴리고 싶나요?

하여간 필름이 끊긴다는 건 해마와 측두엽에서 일어나는 기억을 화학적으로 저장하는 걸 알코올이 방해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현실세계에서 종종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이런 현상을 그리는 것 자체는 별 문제가 없죠.

하지만 영화에서 음주 후 기억상실은 양식화됩니다. 가장 인기 있는 건 주인공이 깨어나 보니 낯선 호텔 방 침대에 누워 있고 그 옆에는 처음 보는 사람이 잠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더 심각한 경우는 그곳이 라스 베가스처럼 결혼을 쉽게 할 수 있는 곳이고 둘은 술에 진탕 취한 채 부부가 되었다는 거죠. 이런 설정은 주로 로맨틱 코미디에 활용됩니다. 처음 만났지만 성적으로 끌리는 낯선 사람들 둘을 억지로 엮어서 소동을 만들 수 있으니까요. 이런 경우 두 사람은 끝에 온전한 정신으로 재결합하며 그들의 본능적 이끌림을 정당화하기 마련입니다.

여기엔 몇 가지 변주가 존재합니다. 우선 두 사람들 중 한 사람만 필름이 끊기는 경우가 있죠. 이런 경우 둘은 대부분 친구 사이이며 그 날 이후 어색한 짝사랑의 관계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더 고약한 경우, 여자가 남자 몰래 빠져나온 뒤 임신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건 의도적인 접근일 수도 있고 어쩌다 발생한 사고를 혼자 책임지는 경우일 수도 있죠.

보다 끔찍한 경우는 옆에 누워 있는 사람이 죽어 있을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 주인공은 자신이 술김에 누군가를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에 시달리지요. 이런 경우 음주 후 기억상실은 진짜 기억상실의 대체물로 기능합니다. 실제 기억상실보다 훨씬 현실성도 있고요. 그러나 이런 설정에서 주인공이 정말로 술에 취해 살인을 저지르는 경우는 거의 없지요. 오히려 가상현실조작이 상대적으로 더 흔한 진상입니다.

물론 주인공이 자기 집이나 공원에서 깨어나 필름이 끊기는 걸 확인하는 영화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클리셰에서 제외해야겠죠. (08/10/30)

DJU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