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폭장치

리들리 스코트의 [에일리언] 후반부에서 노스트로모 호의 승무원들은 자기네들을 한 명씩 살해하는 괴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주선을 자폭시키고 승무원만 셔틀로 탈출하는 것뿐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물론 그건 다 쓸모없는 짓이었죠. 노스트로모가 폭발하기 직전에 괴물은 유일한 생존자 리플리와 함께 셔틀선에 숨어들었으니까요.

전 [에일리언]을 정말 좋아하지만 이 작품의 막판 논리에는 영 공감하기 어렵습니다. 정 괴물이 무섭다면 셔틀선을 타고 우주선 밖으로 나가기만 해도 됩니다. 우주선 근처를 떠돌면서 구조요청을 해도 되지요. 굳이 우주선을 폭파할 필요는 없단 말입니다. 사실 꼭 셔틀선을 타고 우주선 밖으로 나갈 필요도 없을 거예요. 그 정도 크기의 우주선이라면 괴물이 있는 곳만 차단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을 거란 말이죠. 아무리 생각해도 노스트로모의 폭파는 우스꽝스러운 낭비입니다.

더 웃기는 건 노스트로모에 자폭장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요? 노스트로모는 우주화물선입니다. 대단한 비밀 같은 건 가지고 있지도 않아요. 물론 여러분은 외계 종족과 만날 가능성 같은 걸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죠. 그래도 괴상한 건 마찬가지입니다. 노스트로모가 악의있는 지성종족과 우주 어딘가에서 만난다면 이미 그 종족은 노스트로모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테크놀로지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니 말이죠. 테크놀로지를 빼앗길 걱정 따위는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지구가 어디있느냐 따위의 정보가 유출될까봐 걱정된다면 그 부분만 따로 없애면 되는 거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폭장치는 어디든 있습니다. 대부분 그 장치는 막판까지 숨겨져 있다가 주인공이 적들을 없애는 마지막 수단으로 등장하죠. 주인공은 간신히 탈출하거나 막판까지 남아 동료들이 탈출할 때까지 시간을 벌다가 자폭합니다. 여기서 자폭장치는 일종의 기계장치의 신으로 엉키고 엉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등장합니다.

물론 모든 자폭장치가 이런 클리셰에 해당되는 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다크 나이트]의 특정 장면에 나오는 자폭 장치는 클리셰라고 할 수 없죠. 제가 배트맨이라고 해도 자기 차에 자폭 장치를 달고 다닐 테니까요. (09/03/20)

DJU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