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본드

여기서 제임스 본드란 이언 플레밍의 소설에 나오는 수퍼 스파이가 아니라 그 영향을 받은 무리들을 막연히 지칭합니다. 이들은 주로 1960년대에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죠. 대부분 잘 생긴 중년 남자이며 주로 턱시도를 입고 사치스러운 라이프스타일을 유지하고 있고 여자에게 인기가 많은 바람둥이이고 온갖 재미있는 비밀무기를 소유하고 있으며 늘 지구를 멸망시키려는 악당들과 맞서 싸웁니다. 대표적인 예로 (당연하지만) 제임스 본드가 있고, 텔레비전 시리즈 [U.N.C.L.E.에서 온 사나이]의 나폴레옹 솔로, 멧 헬름 시리즈, 플린트 시리즈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가장 유명한 예일 뿐이고, 당시엔 이런 것들이 전세계에서 쏟아져나왔어요.

이들의 존재는 조금 부조리합니다. 정부에 기용된 스파이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일들만 골라 하고 있으니까요. 스파이들은 결코 사람들 눈에 이렇게 튀는 짓을 해서는 안 됩니다. 누구 말마따나 영화 속의 제임스 본드가 하는 짓을 그대로 한다면 거리에 나간지 10분만에 살해당하죠. 고로 이들은 일종의 판타지 캐릭터인 셈입니다. 60년대의 쾌락주의적인 남성들이 냉전과 경제호황을 연료삼아 환상을 불태운 것이죠.

웃기는 건 이 판타지가 오리지널 제임스 본드와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영화에만 익숙한 사람들이 플레밍의 본드 소설을 읽는다면 많이 당황할 것입니다. 르 카레의 주인공들과는 다르지만, 이 캐릭터는 고정관념에 비해 훨씬 '문학적'이에요. 그의 파트너로 나오는 여자주인공들도 영화 속에 나오는 얄팍한 쾌락의 대상과는 거리가 멀고요. 고로 제임스 본드의 이미지 자체도 영화가 만들어지고 60년대의 분위기를 따라가면서 일종의 클리셰에 빠져든 것입니다. 전 그 클리셰가 가장 전형적인 모습으로 구현된 것이 피어스 브로스넌의 007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시리즈에 대해 더 잘 아는 분들은 다른 본드를 지적할 수도 있을 겁니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장수하고 있는 오리지널 본드 시리즈를 제외하면 다른 본드 아류작은 6,70년대를 넘어가면서 대부분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없어졌던 적은 없었죠. 적어도 본드 류의 텔레비전 시리즈는 아주 최근까지 만들어졌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작품 셋을 들어보죠. 79년작인 [A Man Called Sloane], 94년에 만들어진 [Fortune Hunter] 그리고 2000년에 만들어진 [Secret Agent Man]. 다들 단명한 시리즈지만 이 공식의 인기가 쉽게 죽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고 있죠.

지금 이 전통은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되고 있는 중입니다. [XXX]처럼 노골적으로 007의 스테레오타입을 뒤집은 영화도 있고, [오스틴 파워즈] 시리즈처럼 007과 해리 파머 시리즈를 합쳐놓은 패러디도 있으며, 보다 심각하고 좌파적인 마인드를 가진 제이슨 본 시리즈도 있습니다. 요새 나오는 007 영화도 이전 같지는 않죠. 다들 오리지널 제임스 본드보다는 제이슨 본에 더 가깝다고 하니까요. 그러나 진정한 제임스 본드의 전통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과연 존재한 적은 있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생각해봐야 할 겁니다. 6,70년대만 해도 스파이 장르가 제임스 본드의 뒤만 따랐던 것은 아니니까요.

가장 최근에 나왔고 가장 정통적인 제임스 본드 아류물은 [OSS 117] 시리즈입니다. 아류라고 부르면 서운할 수도 있겠군요. 원작소설은 이언 플레밍 시리즈보다 먼저 나왔다니.

(09/03/30)

DJU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