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밍아웃

커밍아웃은 동성애 주제 영화들이 본격적으로 쏟아져 나오던 1990년대엔 가장 중요한 테마였습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두 팔을 쳐들며 "나는 여기 있어요!"라고 외치면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그 증명을 바탕 삼아 다음 단계로 나갈 수 있는 게 아닙니까.

게다가 이건 감동적인 드라마 소재이기도 했습니다. 이 안에는 좋은 드라마를 만들 수 있는 수많은 재료들이 있어요. 억압된 욕망, 금지된 사랑, 사회적 제약, 감동적인 고백... 여기에 에이즈라는 질병과 종교적 광기를 깔면 완벽해지죠. 과정은 험악하더라도 결말은 대부분 해피엔딩입니다. 당시엔 해피엔딩 역시 정치적 선언이었죠.

그런데 과연 이 공식에서 얼마나 다양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까요? 별로 없어요. 물론 서부극이나 로맨스 영화도 기본 공식은 이야기는 뻔합니다. 동성애 영화도 뻔한 설정 안에서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거겠죠. 하지만 소위 동성애 영화를 간절히 바라는 고정된 관객들에게 집중적으로 뻔한 커밍아웃 스토리만 뱉어댄다면 관객들은 쉽게 지치게 됩니다. 그러는 동안 세상 역시 빨리 변해갔고요. 특별히 안티 세력이 줄어든 건 아니지만 이제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 동성애자 캐릭터가 등장하는 건 대단한 일도 아닙니다. 엘렌 모건이 [엘렌]에서 커밍아웃 한 뒤로 세상이 그렇게 많이 바뀌었습니다. LGBT 사회에서도 커밍아웃 이후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도 커밍아웃은 좋은 소재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대 분위기에 적응하고 클리셰를 피하며 소재를 다루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야 가능하죠. 그냥 커밍아웃을 선언하는 것만으로는 어림없습니다. 그건 (적어도 장르내에서는) 흘러간 뉴스니까요. (09/05/15)

DJU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