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빈첸조 나탈리 Vincenzo Natali

주연
니콜 드 보어....레븐
Nicole de Boer....Leaven
모리스 딘 윈트....쿠엔틴
Maurice Dean Wint....Quentin
니키 가다니....할로웨이
Nicky Guadagni....Holloway
데이빗 휼렛....워스
David Hewlett....Worth
앤드류 밀러....카잔
Andrew Miller....Kazan
웨인 롭슨....렌
Wayne Robson....Rennes
줄리안 리칭스....올더슨
Julian Richings....Alderson

1.

[용가리]라는 영화 자체에 대해 뭐라고 말할 생각은 없습니다. 과연 그 영화를 보게 될지도 알 수 없으니까요(아마 특별한 일이 없다면 보지 않을 겁니다. 전 그렇게까지 대단한 거대 괴수 영화의 팬은 아닙니다.)

그러나 [용가리]가 '한국적 SF'가 나갈 유일한 길처럼 선전하는 분위기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건 말해도 되겠지요. 저한테는 뭔가 순서가 바뀐 것처럼 보입니다. [용가리]는 진부한 아이디어에 거대 자본을 끼워넣은 영화니까요. 이런 영화의 존재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우리가 '한국식 SF'를 시작하려고 한다면 오히려 그 반대여야 하지 않을까요?

사실 SF 영화는 처음부터 거대 자본의 장르는 아니었습니다. SF에 거대 자본이 개입된 건 극히 최근의 일입니다. 원래 SF는 반대로 저예산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비싼 스타와 감독을 쓸 수 없었던 B급 영화 제작자들이 그 대안으로 내놓았던 것이죠. [메트로폴리스]와 같은 영화들은 아주 예외적인 존재였습니다.

헐리웃이 거대 자본을 들인 대규모 SF로 시장을 먹어들어가고 있다면 그 틈 사이를 파는 것이 오히려 여러 면에서 유리할 수도 있습니다. 틈새 시장을 파고 드는 것도 더 쉽고, 더 흥미로운 영화가 나올 수 있는 가능성도 높고요.

2.

[큐브]의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정육면체의 방들로 구성된 미로 속에서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곳곳에 설치된 부비 트랩을 피해 밖으로 나가려 발버둥친다는 것이죠.

짐작하시겠지만, 이 영화는 정말 작은 영화입니다. 영화는 어떻게 저예산으로 그럴싸한 영화를 만들까 고민한 흔적이 역력합니다.

우선 세트를 보죠. 주인공들은 끝없는 미로들을 오가지만 사실 다 같은 세트에서 찍은 것입니다. 세트의 조명색을 바꾸어서 마치 다양한 세트에서 찍은 것처럼 속인 것이죠. 특수 효과? 이 영화에 나오는 컴퓨터 그래픽은 정말 잔손 안 가는 것들입니다! 오브젝트들은 모두 정육면체나 원뿔, 원통형들입니다. 능숙한 전문가라면 점심 먹으면서 한 손으로도 해치울 수 있는 것들이죠. 어느 정도 공을 들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약간의 고어를 위한 시체 분장 정도입니다. 그러니 이 역시 돈이 많이 드는 작업은 아니에요. 배우? 전 두 사람 정도가 낯이 익지만 (쿠엔틴 역의 모리스 드 윈트와 레븐 역의 니콜 드 보어) 그것도 그들이 스타이기 때문이 아니라 어쩌다 텔레비전에서 본 얼굴을 기억해냈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엔 스타 같은 건 없습니다. 심지어 캐나다 기준으로 봐도 그렇지요.

그러나 가장 흥미진진한 부분은 바로 아이디어의 절약입니다. 생각 없는 사람들은 '저예산의 한계를 아이디어로 극복하자!'어쩌구를 내지르지만, 아이디어는 공짜가 아닙니다. 이 역시 공급의 한계가 있고 파내려면 노동과 돈이 드는 자원이죠. 의심나시면 머리를 굴려보세요. 아이디어가 그렇게 쉽게 나오나.

사실 저예산 영화 제작자들은 아이디어 창출 면에서도 헐리웃에 쉽게 밀립니다. 헐리웃 사람들에겐 아이디어를 사들이고 작가들을 고용할 돈이 있거든요. 창조적인 저예산 영화들은 작가들이 정말 헐리웃 사람들보다 창조적이어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대자본 영화들이 모험을 피해 비켜나간 틈새를 파고 든 것들입니다.

[큐브]는 어떨까요? 이 영화는 겉보기만큼 독창적은 아닙니다. 일단의 사람들이 정체불명의 상황 속에 뚝 떨어지는 이야기는 넘쳐 흐릅니다. 우린 이런 이야기를 [트왈라이트 존]을 통해 죽도록 봐왔습니다.

이야기 전개 방식도 특별날 것 없습니다. 특히 영화의 초반부엔 너무나 익숙한 장면들이 난무하죠. "이건 정부의 음모야!"를 외쳐대는 음모론자, 갑작스러운 좌절과 반목... 상황에서부터 캐릭터 설정까지 다들 어디서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나 영화는 슬쩍 이 단계를 넘어갑니다. 어떻게 했느냐고요? 여기에 이 영화의 영리함이 있습니다. 영화는 스토리의 수학적 게임 측면을 강화했고 캐릭터들을 단 한 번씩만, 그러나 적절히 뒤집었습니다.

둘 다 전적으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해내는 것보다 훨씬 정신 노동이 적게 드는 작업입니다. 그러나 효과는 좋습니다. 이제 미로는 추상적 악몽이 아니라 해결할 수 있는 퍼즐입니다.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으므로 서스펜스는 강조되고 스토리는 강화됩니다. '시간되면 부비 트랩으로 사람 죽이기'보다 훨씬 짜임새 있는 영화가 나오는 것이죠.

캐릭터 전환도 효율적입니다. 이런 전환이 이들을 스테레오 타입에서 구제해주는 것은 아니며 갈등 요소가 덜 진부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래도 스토리에 모양이 생기며 차례로 등장하는 부비 트랩보다 훨씬 강한 서스펜스가 생기며 또 갈등 구조가 입체적인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착시 현상도 유발하죠.

결과는 성공적입니다. [큐브]는 90분 동안 충분한 긴장과 서스펜스, 적절한 불쾌감을 주면서도 관객들을 바보로 만들지 않는 알찬 호러입니다. 초반이 좀 늘어지고 결말이 살짝 작위적이며 가끔 연기가 지나치게 멜로드라마틱해지긴 하지만 그 정도는 이해해 줄 수 있습니다. 하여간 이렇게 적은 자원으로 이 만큼 빵빵한 영화를 만드는 것도 쉽지 않으니까요.

[큐브]를 보고 '이 정도면 우리도 만들 수 있겠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와주길 바랍니다. 아마 그게 '한국식 SF'를 쌓을 수 있는 더 빠른 지름길일 겁니다. (99/07/19)

DJUNA

기타등등

이 영화의 캐릭터 이름은 모두 감옥 이름에서 따온 것이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