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빈첸조 나탈리 Vincenzo Natali

주연
제레미 노덤....모건 설리번
Jeremy Northam....Morgan Sullivan
루시 루....리타 포스터
Lucy Liu....Rita Foster
나이젤 베넷....핀스터
Nigel Bennett....Finster
티모시 웨버....캘로웨이
Timothy Webber....Calloway
데이빗 훌렛....버질 던
David Hewlett....Vergil Dunn
카리 매트쳇....다이앤 서즈비
Kari Matchett....Diane Thursby

리타와 모건

빈첸조 나탈리의 전작 [큐브]의 독창성을 기대하고 [싸이퍼]를 보러 온 관객들은 실망할 겁니다. 흥미로운 설정과 아이디어를 통해 도식적인 스토리를 극복했던 [큐브]와는 달리 [싸이퍼]는 이전에 어디서 본 이야기와 아이디어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영화는 나탈리 버전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이기도 하지만 나탈리 버전 [패럴랙스 뷰]나 [세컨즈]이기도 합니다.

영화는 실직한 회계사인 모건 설리번이 디지콥이라는 다국적 회사의 산업 스파이로 취직하며 시작됩니다. 잭 서즈비라는 가명으로 미국 중부의 무개성적인 도시들을 오가며 지루한 컨벤션들에 참가하던 그는 리타 포스터라는 정체불명의 여인을 알게 됩니다. 그녀를 통해 디지콥이 그를 세뇌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디지콥의 상대 회사인 선웨이사의 이중 스파이가 됩니다. 하지만 여러분도 이것이 진상의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겁니다.

나탈리는 필립 K. 딕식 정체적 위기라는 주제를 다국적 기업의 산업스파이라는 현대적 설정에 담아 6,70년대 스파이/정치물의 패러노이드와 결합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총체적인 결과는 무척 히치콕풍입니다. 자신이 이 게임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도 모르는 한 남자가 적인지, 아군인지도 알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끝도 없이 쫓기는 것이지요. 특히 모건 설리번과 그의 알타 에고 잭 서즈비의 관계는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의 주인공 로저 O. 손힐과 조지 캐플런의 관계를 인용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리타는 이브 켄달이고요.

나탈리와 각본가 브라이언 킹은 차가운 유머를 통해 아주 얄미운 미국의 초상을 그려보이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무대는 우리에게 익숙한 뉴욕이나 LA와 같은 대도시가 아닙니다. 미국 중부의 다각형 주들에 속해 있는 무개성적인 도시들이지요. 영문도 모르면서 이 이름없는 도시들에 열리는 지루한 컨벤션들을 따라다니는 모건 설리번의 모습은 언제나 대체가능한 기계 부품과도 같은 현대인의 존재 위기를 상징하는 듯 합니다. 물론 이 영화가 미국 영화를 위장한 캐나다 영화라는 걸 생각하면 이 야유는 미국이라는 보다 구체적인 대상을 놀려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는 제레미 노덤과 루시 루라는 두 배우에게 흥미진진한 연기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특히 노덤은요. 스파이 행각이라는 직업에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게 열광하는 전직 회계사에서 능수능란한 산업스파이로, 산업 스파이에서 쫓기는 히치콕 주인공으로 물흐르듯 변신하는 그의 연기는 멋진 연기 견본이기도 합니다. 루시 루의 리타는 훌륭한 히치콕 여자 주인공입니다. 차갑고 매력적이며 신비스러워요.

전 이미 [싸이퍼]가 결코 신선한 영화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영화가 내세우는 반전도 그렇게 뜻밖은 아니에요. 후반부는 지나치게 장황하다는 느낌이 들고 복선들은 예측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싸이퍼]는 날씬하게 디자인된 장르 영화이고 전 이런 영화들의 장점을 가볍게 여긴 적이 없습니다. 물론 노덤과 루라는 두 배우들의 잘 짜여진 연기를 구경하는 재미 역시 만만치 않고요. (03/11/18)

DJUNA

기타등등

나중에 비슷한 소재를 다룬 [페이첵]과 비교해보기로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