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마리오 바바 Mario Bava

주연
존 필립 로....디아볼릭
John Phillip Law....Diabolik
마리사 멜....에바 칸트
Marisa Mell....Eva Kant
미셸 피콜리....징코 경위
Michel Piccoli....Inspector Ginko
아돌포 첼리....랄프 발몽
Adolfo Celi....Ralph Valmont
클라우디오 고라....경찰국장
Claudio Gora....Police Chief
마리오 보넨....다넥 경사
Mario Donen....Sergeant Danek
카테리나 보라토....레이디 클락
Caterina Boratto....Lady Clark
테리 토머스....재무부 장관
Terry Thomas....Minister of Finance

디아볼릭과 에바

마리오 바바의 [디아볼릭]의 원작은 안젤라와 루치아나 구이시니라는 밀라노 출신의 자매 만화가가 쓴 동명 만화책입니다. 이 작품은 가장 성공적인 유럽 만화책들 중 하나이며 아직도 연재되고 있다고 하죠. 여기에 가면 이탈리아어 공식 페이지를 볼 수 있습니다.

디아볼릭은 한마디로 아르센 뤼팽과 팡토마 풍의 수퍼 범죄자입니다. 늘 눈과 눈썹만 드러나는 검은 가면을 쓰고 다니면서 부자들의 돈과 보석들을 훔치죠. 그렇다고 그걸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느냐... 그건 물론 아니죠. 그는 훔친 물건들을 지하의 비밀 아지트에 숨겨두고 혼자만 씁니다. 어느 정도 하한선은 긋고 다니는 뤼팽과는 달리 이 친구는 인명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에피소드에도 디아볼릭 때문에 목숨을 잃은 건전한 시민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거의 9/11 테러리스트 수준에 맞먹죠. 물론 그가 진짜로 악의를 품고 죽이는 사람들은 자기나 여자친구 에바를 괴롭히는 악당들이겠지만요. 다른 무도덕적인 범죄자들과는 달리 디아볼릭은 끝까지 여자친구에게 충실한데, 이건 원작자가 여자들이어서 그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디아볼릭의 안티 히어로 설정은 전형적인 이탈리아 문화의 산물입니다. 이 친구의 모험담은 정부의 권위를 개 코끝에 묻은 얼룩보다 하찮게 생각하고 세금을 안 내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킬킬대며 볼 수 있는 내용이죠. 집단의 권위는 처절하게 무시되고 개인의 얄팍한 욕망은 어떤 양심의 가책도 거치지 않고 완벽하게 충족됩니다. 디아볼릭은 정부의 세무 시스템을 파괴하고 파산 직전의 정부로부터 금을 빼돌린 뒤 레이저로 녹인 금을 아지트에 뿌리면서 악마처럼 웃어댑니다. "으하하하하, 으하하하하".

마리오 바바는 이 황당무계하고 건전하지 못한 이야기를 소재로부터 한 1미터 쯤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바바의 영화는 자주 비교되는 [배트맨] 시리즈처럼 작정하고 캠피하게 만든 시리즈는 아닙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진지하게 다룰 생각 역시 없죠. 아무리 진지하게 다루어도 결국 만화적 황당함과 60년대 특유의 유치한 쾌락주의에 휩쓸리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바바는 자신이 유머와 황당함을 통제할 수 있을 정도만 태도를 관리하고 나머지는 소재에게 맡깁니다. 그리고 엔니오 모리코네의 삥뽕거리는 음악이 흐르는 동안 소재는 정말 일을 알아서 합니다.

바바의 영화는 여전히 빠듯한 제작비를 창의성으로 커버하는데 이골이 난 B급 영화감독의 작품입니다. 디노 디 로렌티스라는 든든한 제작자가 뒤에서 버티고 있었지만, 영화에 들어간 돈이 당시 유행이었던 007 영화들의 제작비보다 한참 부족했음은 말할 필요 없겠죠. (이 영화의 제작비는 40만 달러, 1년 전에 나온 [You Only Live Twice]의 제작비는 950만 달러였습니다) 하여간 바바가 부족한 돈을 상상력과 저예산 특수효과로 커버하는 과정은 그 자체가 흥미로운 구경거리입니다. 세무서 건물들이 폭파되는 장면들이 미니어처 티가 너무 나긴 하지만, 전체적인 최종결과물이 당시 007 영화들보다 크게 나쁜 것 같지도 않아요. 디아볼릭의 아지트 같은 건 거의 공짜로 얻은 로케이션의 덕을 단단히 봤다고 하더군요.

만화 원작이 영화화 되는 과정 역시 주목할만 합니다. 제가 본 DVD 부록에는 바바가 책장이나 비행기 날개와 같은 사물들을 이용해 어떻게 만화의 만화칸 효과들을 살렸는지 지적하고 있더군요. 솔직히 전 보는 동안 눈치 못챘습니다. 하지만 이 2차원 매체가 가진 간결한 표현력과 정신나간 에너지, 괴상한 미래주의적 디자인이 어떻게 이 노련한 거장의 손을 거쳐 살아 움직이는 영상으로 번역되었는지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이 두 스타일의 조화가 너무 그럴싸해서 이 사람의 고딕 호러에만 집중했던 제 관심을 조금 넓힐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개인적으로 전 이런 식의 수퍼 범죄자들의 팬은 아닙니다. 영화를 보는 동안에도 전 경직된 표정으로 눈썹만 움직이던 존 필립 로(인터뷰에서는 참으로 온화하게 늙은 노인네더군요)의 디아볼릭보다는 박봉과 상사들의 구박에 시달리며 디아볼릭을 쫓는 미셸 피콜리의 징코 경위에게 훨씬 더 잘 감정이입이 되었답니다. 일단 디아볼릭이 추구하는 쾌락이 제 코드와 잘 맞지 않아서였을 거예요.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디아볼릭은 처음부터 그렇게까지 감정이입의 대상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비행기에서 몸을 던지고 검은 재규어로 고속도로를 질주하고 에머럴드 목걸이를 훔치기 위해 탑을 기어오르고 마리사 멜의 벌거벗은 육체와 함께 달러 지폐 속에서 뒹구는 역할을 수행하는 역동적인 피사체지요. 관객들이 그가 누리는 쾌락을 탐한다고 꼭 그의 캐릭터에 몰입해야 한다는 법은 없겠죠. (05/06/23)

DJUNA

기타등등

디아볼릭이 했던 것처럼 에머럴드를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죠. 조금 막연히 말한다면, 그 자리에 넣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데다가, 넣었다고 해도 결국은 들통날 것이며, 들통나지 않는다고 해도 그 상황 속에서 온전한 모양을 유지할 가능성이 없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