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용이

주연
배두나....정현채
김남진....이동하
윤지혜....박미란
윤종신....양지석
오광록....정훈
이얼....박윤호
이지원....윤선옥
임현결....엄소희
김향숙....파마머리
한재덕....기관사 1
장유....기다리는 남자
이지은....어린 현채
김소연....선녀
신태훈....나뭇꾼
엄태웅....이영석
조상기....곽팀장
김홍표....윤팀장
한영애....김진섭
용이....방찬호
권오중....도서관 남자

동하와 현채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의 원래 제목은 [밑줄 긋는 남자]. 당연히 사람들이 카롤린 봉그랑의 동명 소설의 번안작품이라고 생각할만한데, 만든 사람들은 모티브만 따왔을 뿐 번안은 아니라고 하는군요.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는 저도 모르겠지만, 밑줄 긋는 설정을 화집의 메모로 고치고 원작자에게 시나리오를 보여주어 상관없다는 답변까지 받았다니 판권 문제는 없는 모양입니다. 하여간 이 영화는 끝도 없이 개봉일이 늦추다가 결국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라는 제목을 달고 10월 중순에 개봉하게 되었는데, 그 동안 이들이 무슨 일들을 겪었는지는 전 모릅니다. 다들 구체적인 정보를 주는 대신 고생이 많았다는 말만 되풀이하니까 말이에요.

줄거리를 소개해드리죠. 우리의 주인공은 현채라는 할인점 직원입니다. 삼류소설가인 아빠를 위해 도서관에서 화집들을 빌리던 현채는 언젠가부터 자기가 빌리는 책에 구애의 문구들이 적혀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현채는 문구들의 지시에 따라 화집과 화집을 오가며 이 '메모 적는 남자'의 정체를 밝히려고 하죠. 그러는 동안 현채를 짝사랑하는 학교 동창 동하는 그런 현채의 뒤를 졸졸 따라다닙니다.

봉그랑의 원작소설을 읽으신 분들은 어쩔 수 없이 이 두 작품의 유사성을 비교하게 됩니다. 아무리 밑줄을 메모로 고치고 보다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의 스토리로 이야기를 끌어간다고 해도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는 여전히 [밑줄 긋는 남자]의 사생아이니 말이에요. 아이디어는 몽땅 빌린 것이나 다름없고 구성도 거의 같습니다.

영화는 [밑줄 긋는 남자]보다 안전하고 전형적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정말 나쁜 일이나 관객들의 고정관념을 뒤흔들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영화가 하려는 건 아주 소박합니다. 이 조금은 어처구니없는 소동을 통해 두 주인공들을 엮어주고 소박한 사랑의 힘을 재확인하는 것이죠.

덕택에 밑줄... 아니 메모 적는 남자의 아이디어는 날개를 펴지 못합니다. 봉그랑의 소설과는 달리 영화엔 현채가 머리를 쓸만한 부분이 거의 없습니다. 상황을 보면 메모 적는 남자가 하라는 대로 하며 증거도 없는 억측만 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현채와 동하의 로맨스도 그렇게까지 긴밀하게 메모 적는 남자와 연결되지 못합니다. 덕택에 영화의 호흡이 고르지 못하다는 느낌이 들어요. 코미디와 멜로드라마도 조금씩 따로 놀고요.

영화는 남는 시간을 현채에 대한 동하의 감정이 얼마나 깊은지 보여주는 데 사용하고, 그 결과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는 환영을 쫓던 주인공이 옆에 있는 사랑을 발견한다는 고전적인 이야기가 됩니다. 나쁜 일은 아니죠. 특별히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지만 이런 이야기는 늘 수요가 있고 필요한 법이니까요. 그러나 아무리 흉내라고 해도 충분히 흥미진진할 수 있었던 소재를 아무런 위트나 지적 도전 없이 방치해두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이었을까요? 전 낭비였다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동하를 현채의 수색에 보다 밀접하게 참여시켰다면 같은 이야기를 해도 더 그럴싸해질 수 있었어요. 원작과 더 비슷해질 수도 있었겠지만 반대로 오히려 자기만의 차별성을 얻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현채의 백일몽

영화는 자기 개성을 세우기 위해 몇몇 시각적 스타일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현채의 백일몽 장면들입니다. 현채는 종종 화집의 그림들과 연결된 만화적인 꿈을 꾸죠. 가끔은 재미있지만 그렇게까지 인상적이지는 않군요. 상상 자체가 굉장히 안전하고 조금 흔하거든요. 결정적으로 이 영화의 감각은 아무리봐도 저랑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가벼운 웃음이라고 나쁠 건 없지만 어떤 때는 상상력 부족한 중학생의 일기장처럼 그냥 유치하기만 한 걸요.

캐스팅은 안전합니다. 배두나나 김남진은 모두 그럴싸하게 맞습니다. 하지만 역시 너무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어요. 배두나는 아기곰처럼 귀엽지만 이 사람이 이 영화에서 써먹고 있는 개인적인 매력은 너무나도 쉽게 예측 가능합니다. 그리고 배두나는 조금씩 어긋나 있을 때 더 잘 하는 배우거든요. 김남진에 대해서는 모르겠습니다. 전 [연애소설]도 [천년지애]도 안봤어요. 이 영화에서는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만.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는 죄없는 영화입니다. 가끔 재미있고 종종 귀여워요. 그러나 모든 것들이 너무 안전합니다. 어떤 때는 그 안전함에 질식할 지경으로요. (03/10/02)

DJUNA

기타등등

맘먹고 바꾼 제목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도 무라까미 하루끼 소설에 나오는 문구와 비슷하다고 해서 말들이 많죠. 전 그 정도면 상관없다고 생각하지만 또 모르겠군요.

그건 그렇고 관련된 질문 한가지 하죠. 우리나라 방송국에서는 유명한 외국 영화의 번역제를 드라마 제목으로 그대로 쓰는 이해 못할 버릇이 있습니다. [순수의 시대], [네 멋대로 해라], [흐르는 강물처럼], [귀여운 여인], [인생은 아름다워], [태양은 가득히], [내일을 향해 쏴라], [뜨거운 것이 좋아], [이브의 모든 것]... 도대체 왜들 그러는지 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