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자크 드미 Jacques Demy

주연
카트린느 드뇌브....당나귀 가죽
Catherine Deneuve....Peau d'âne
장 마레....왕
Jean Marais....The King
자크 페랭....왕자
Jacques Perrin....The Prince
델핀 세릭....라일락 요정
Delphine Seyrig....The Fairy

당나귀 가죽

[당나귀 공주]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유럽 동화 중 하나... 아뇨, 전 샤를르 페로의 [당나귀 공주]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림 형제의 [가지각색 털가죽]을 좋아해요. 거의 비슷한 이야기지만 [가지각색 털가죽]이 더 야무지죠. 제가 이 동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주인공 공주가 신데렐라나 백설공주처럼 운명에 질질 끌려다니는 인물이 아니어서인데, 요정 대모가 등장하는 페로 버전은 아무래도 좀 맥이 빠지죠. 왕자가 먼저 공주를 엿보고 상사병에 빠지는 설정도 공주가 벌이는 유혹의 게임을 많이 망쳐놓는 것 같아요. 게다가 전 페로 버전을 읽을 때마다 그 불쌍한 당나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답니다. 마굿간에서 사랑 받으며 행복하게 살다가 가죽을 얻는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갑자기 도살당한 그 당나귀는 얼마나 황당했을까요?

하여간 내용은 다들 아시죠? 상처한 왕이 죽은 왕비와 똑같이 생긴 딸과 결혼하려 합니다. 딸은 온갖 핑계를 대며 결혼을 미루려 하지만 왕의 의지는 꺾이지 않죠. 결국 공주는 왕이 선물로 준 당나귀 가죽을 뒤집어 쓰고 달아납니다. 이웃나라에서 청소부로 일하던 공주는 그 나라 왕자를 만나고...

자크 드미는 이 기본적인 스토리를 그대로 따라갑니다. 종종 나레이션이나 대사를 그대로 취하면서요. [당나귀 공주]는 페로가 쓴 원작의 꽤 충실한 각색물입니다. 적어도 스토리만 본다면요.

하지만 드미가 이 이야기를 스크린 위에 옮기는 방식은 충실과 거리가 멉니다. 일단 그는 은근슬쩍 시대를 섞고 있어요. 장 마레가 연기한 왕은 딸을 유혹하기 위해 아폴리네르와 콕토의 시를 읊고 마지막 결혼식 장면엔 헬리콥터가 등장하기도 하죠. 이를 설명하기 위해 라일락 요정이 미래의 지식에도 밝다는 말도 안되는 핑계가 나오긴 합니다만.

시대착오적이지 않은 부분들 역시 정상적인 진지함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드미는 무대가 되는 두 나라를 파랑과 빨강이라는 극단적인 원색으로 장식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말의 털이나 하인들의 얼굴까지 같은 색들로 칠하고 있지요. 전체적으로 드미가 만들어낸 세계는 화사한 동화나라라기보다는 신경질적인 디즈니랜드에 가까운 곳입니다. 기분좋게 아름답다기보다는 싼 맛 나게 예뻐요. 어딘지 모르게 [셜리 듀발의 동화극장]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하긴 [셜리 듀발의 동화극장]도 이 영화처럼 막강한 스타들을 동원한 작품이긴 했죠.

영화는 원작의 스토리에 충실하지만 결코 그 스토리를 진지하게 다루지는 않습니다. 중간중간에 삽입되는 미셸 르글랑의 뻔뻔스럽게 달콤한 노래들, 캐릭터에 대한 진지한 몰입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붕뜬 연기, 무엇보다 카트린느 드뇌브가 얼굴에 약간의 그을음을 묻히고 당나귀 가죽을 망또 대신 입으면 세상에서 가장 흉물스러운 괴물처럼 보인다는 설정 때문에 관객들 역시 붕 뜬 기분으로 이 괴상한 동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물론 관객들은 이 영화를 장 콕토의 [미녀와 야수]와 비교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 사이의 연관성은 노골적이니까요. 자크 드미는 이 영화를 위해 [미녀와 야수]의 야수인 장 마레를 불러왔고 콕토가 썼던 수많은 특수 효과들을 그대로 훔쳐오고 있습니다. 심지어 몇몇 의상들도 모방한 흔적이 역력해요.

그러나 드미의 영화는 결코 콕토의 영화와 같은 수준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아니, 도달하지 않습니다. 드미가 정말 콕토의 영화가 가진 시적인 완결성을 원했던 것 같지는 않으니까요. 이 영화는 반대로 경박하고 발랄한 유희 쪽에 가깝습니다. 그걸 탓할 수는 없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여전히 조금 아쉽습니다. 이건 드미의 문제이기도 하고 페로의 문제이기도 하며 결국 동화라는 장르를 다루는 프랑스인들의 문제점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마음을 충분히 열지 않습니다. 끝도 없이 어딘가에서 보고 있을 어른 독자들이나 관객들에게 윙크를 던지며 "그래, 나도 이 이야기가 말도 안 된다는 건 알아"라고 속삭이고 있지요. 심지어 콕토 역시 제정신으로 동화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먼저 '수리수리 마수리'를 외쳐야했으니까요. 드미가 조금이라도 더 마음을 열고 이 동화나라의 이야기를 온 몸으로 받아들였다면 그의 유희도 지금보다 훨씬 흥미진진했을 거예요. (05/05/12)

DJUNA

기타등등

카트린느 드뇌브와 델핀느 세릭이 같은 화면에 등장하자 두 금발이 발하는 광채 때문에 눈이 멀 것 같더군요.